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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하나님의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2013.04)

특수학급 아이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이 아이들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특수학급 아이들도 성장하고 교감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똑같이 배우고 성장하는 걸 다른 교사들이 보면서 생각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에겐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삼척 진주초등학교 박만석 선생님

하나님의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권일한

 

 

 

 

교사가 되고 10년 동안 특수교사를 여럿 만났습니다. 저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을 몇 번 가르쳤는데 그때마다 미안했습니다. 도움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이 미안함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돌아서면 미안하고, 마주보면 답답한 순간을 겪으면서 도움반 아이들은 어떤 존재 가치가 있을까 고민도 했습니다. 새 학년을 맡을 때면 피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래도 예수님 제자라면…….’하는 마음이 늘 싸웠습니다. 피해도 기쁘지 않았고, 맡아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특수교사를 만날 때마다 힘들지 않아?”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무얼 가르칠까? 아이들이 가르침의 의미를 알기는 할까?’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2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지내면서 선생님에게는 힘들지 않아?”라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더라고요. 도움반에 가면 아이들과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합니다. 수업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웃는 사람이 어울립니다. 중증장애아가 있었는데 저한테 아이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고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선생님 옷에는 늘 아이 침과 코가 묻어 있었죠. 그런데 선생님은 그걸 자랑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만 자랑하는 마음도 옳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 부족한 아이를 자신이 돌보고 있다는 어리석은 교만이니까요. 선생님은 아이와 같이 놀고, 아이에게 말하고,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아이인데 늘 가르쳤습니다. 방학이면 아이를 만나지 못해서 걱정하고,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들

선생님은 부모님과 누나 셋과 함께 포항에서 살았습니다. 큰누나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집안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꼭 반대하는 사람이 생기고 대부분은 아버지입니다. 선생님 아버지도 많이 반대했습니다. 혹시라도 술 드시고 오시는 날에 누나들이 교회에 가있으면 억지로 누나들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큰누나는 아버지에게 혼나는 줄 알면서도 철야기도까지 다녔답니다. 큰누나 덕에 작은누나 둘 모두 교회에 다니게 됐지만 선생님은 가지 않았습니다. 교회 아니더라도 힘든 일이 많은데 교회 때문에 나쁜 일이 더 생겼으니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정을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해서 하나님은 아예 관심 밖에 두었습니다.

6학년 때 권종현 선생님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권종현 선생님은 정말 좋은 교사였습니다. 가난한 애들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가정방문도 하셨습니다. 학생들 모두 도시락을 갖고 다니던 시절에 선생님은 만석아, 선생님이 아침 안 먹고 왔는데 네 밥 좀 먹자!” 하며 도시락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늘 김치만 싸와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아셨는지 아침부터 제자 도시락 먹어 버리고는 점심 때 자장면 두 그릇을 배달해서 한 그릇을 주셨습니다. 당시에 자장면은 졸업식 때나 먹는 귀한 음식인데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자장면을 먹으며 정말 행복했답니다. 담임 선생님은 교회에 간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고 엽서도 주셨죠. 선생님을 만나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책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로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알진 못했습니다. 그때는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 사람에게 실망을 겪다보니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느껴지지 않았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하니까 정말 그런지 알아보고 싶어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당시 설교는 성경을 알려주는 내용이 아니었고 성경 공부는 아예 없었습니다.

교회 형의 권유로 다른 교회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강해를 듣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간 날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 , 제사장입니다.’라는 말에 내내 울었습니다. 성경 강해 듣던 교회가 포항 시내에 있었는데 실컷 울고 밖으로 나오니 온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에 제대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하셨고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중학생 때 누나들이 기도회에 갔는데 아버지가 누나들을 방안에 가두고는 혼내셨답니다. 무릎을 꿇게 하시고는 교회 가지 말라고 하는데 굉장히 무서웠답니다. 안 간다고 하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대답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처음에는 심하게 반대하셨는데 고등학교 때는 포기하셨는지 그냥 가게 하셨습니다. 누나들이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괜찮게 지나간 편입니다.

그때까지도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정도 안식처가 아니었죠. 하나님은 고등학교에서 진짜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셨어요. 감사가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미션 & 참우리라는 기독 동아리에서 너무나 좋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형편은 다들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믿음이 굳건한 친구들입니다. 아침 7시까지 등교였는데 학교에 가면 먼저 성경부터 읽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모여서 맛동산 먹으며 말씀을 나누었고, 저녁 먹은 뒤에 모여서 또 말씀 나눔을 했습니다. 말씀 보고 자율학습을 시작하고 중간놀이 시간에도 복도에서 계속 하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불교 재단이어서 기독 동아리는 불법 서클이었습니다. 복도에서 쫓겨나면 쓰레기장에서 모임을 했는데 날아오는 쓰레기를 맞으면서도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집에서 힘든 일 겪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이 어젯밤 무슨 일 있지 않았니? 생각나서 기도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로 긴밀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신학생처럼 하나님 이야기하며 행복해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고3 때 친구들과 함께 부산에서 열리는 선교 세미나에 가기도 했습니다. 세계 지도에 손가락을 얹고 중보기도하기도 했죠. 각자 정한 나라가 있었는데, 타지키스탄을 위해 기도하는 친구에게 타직의 피가 흐른다라고 농담 하던 기억도 납니다.

고등학교에서 1030분에 야간학습 끝나면 두 번 차를 타고 집에 가야 합니다. 첫 차 내리는 곳에 교회가 있는데 막차를 안 타고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1, 2시에 걸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교제한 친구들은 목사, 선교사, 특수교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교제합니다. 친구 중에 한 명은 지난주(23)에 코스타리카로 선교하러 떠났어요. 지금은 고등학교가 이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이야기하기는커녕 삶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가볍고 충동적인 이야기,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에 빠져 버렸습니다. 교회 중고등부도 하나님보다는 재미와 행복을 원하느라 하나님을 잊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라

선생님은 대학에 대한 꿈이 없었어요. 군대 갔다 온 뒤에 대학 자퇴하고 선교하러 가는 꿈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대학 입학 원서 쓸 때 캄보디아 단기 선교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토요일마다 하는 모임에서 10명 정도가 갔는데 고등학생은 혼자였죠. 특수교육도 이슬람권에서 선교하기에 좋다고 해서 선택했습니다. IVF 조장의 평가가 만석이는 모든 것이 선교에 맞춰져 있음. 너무 선교만 생각함. 현실성이 떨어짐이런 내용이었어요. 정말 선교로 생각하고 선교로 살았습니다.

1학년 마치고 1년 동안 선교 훈련 받으러 영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많이 깨졌습니다. 4년 동안 이슬람국에서 선교하신 분이 우리를 이끈 단체 대표였는데 선교에 비전이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교 단체 세우는 게 목표였던 것 같아요. 대표님과 팀 사람들이 많이 부딪쳤어요. 선교하려고 훈련 받으러 갔는데 헌신된 선교사가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을 본 겁니다. 선교사들끼리 싸우고 편 가르고 그랬어요. 신학대학 나온 분들이 기도회 끝나면 편 가르고 싸우고……. 어릴 때여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선교는 대단한 일입니다. 선교사로 헌신하고 외국에 가는 일도 대단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척척 잘 되지는 않습니다. 고귀한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헌신은 대단하지만 선교사도 죄성을 지닌 인간이고, 힘든 상황에서 모난 부분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걸 보면서 선교만을 목적으로 오면 그 나라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겠다, 하나님 영광과는 상관없는 길로 가겠다.’라는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그래서 훈련 받아야겠다. 내가 성장해야겠다. 사람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교지에서는 사람을 양육해 본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걸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선교가 이렇게 어려운데도 선교를 하겠느냐?’하고 물으시는 것 같았고 해답을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훈련 받는 중에 이스라엘에 갔어요. 20009월에 유대인이 이슬람 사원인 황금돔(이슬람 3대 성지 중 하나)에 들어가 총을 쏘았고, 팔레스타인 무슬림이 통곡의 벽에 불을 지른 직후였어요. 전쟁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와 사랑을 주실 것 같은 땅에서 미움과 고통과 증오를 봤어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더 빨리 오셨으면 하는 절망을 느꼈어요.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났는데 굉장히 활달했어요. 하지만 평화의 성이라는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고통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어요. 거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뭘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쉬운 게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예수님 믿고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참 어려웠어요. 선교라는 게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스라엘에서 한국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선교사라고 하는데 거기서는 평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팔레스타인을 함부로 대하더라고요. 선교사가 선교는 하지 않고 관광 가이드를 하거나 공부만 하고 돌아간다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선생님이 위기를 겪을 때는 하나님이 사람을 보낸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일 때 권종현 선생님을 보내셨고, 고등학교에서는 친구들을 보내셨고, 이곳에서는 김채순 선교사님을 보내주셨어요.

김채순 선교사님은 이스라엘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님에게는 저와 3살 차이가 나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아들처럼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배낭에 물 한 병, 오이, 초콜릿을 넣고 우리를 엔게디 광야로 데려가셨어요.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걸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걷다가 걷다가 큰 바위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교사님은 광야는 말씀하신다는 뜻이 있다.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모세와 예수님과 다윗도 광야를 겪었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곳에서 힘든 이야기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는데 하나님이 선교사로 부르신다면 헌신하겠습니다. 가난한 게 너무 싫은데 하나님 때문에 가난해야 한다면, 선교사로 가야 한다면 힘들지만 가야 하는 게 행복할 것입니다. 이 고백을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선교사님은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에서 위로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도 이스라엘에 계실 겁니다.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들의 사랑으로

선교 훈련하면서 겪은 일로 마음이 혼란할 때 영국에서 박영선, 쉐퍼 책을 만났어요. 주로 세계관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선교 훈련에서 돌아와서 IVF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학과 공부는 선택이고 IVF가 우선이었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말씀 보는 것도 좋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았어요. 2학년 때는 조원을 어떻게 돌볼까 고민했습니다. 첫 조원은 특수교사가 되었는데 2년 전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사람을 길러 내고 후배들이 변하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3학년 때는 대표를 했습니다. 대표를 하면 강하게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이 심해서 학생센터에 가서 상담 받기도 했어요. 선교에 대한 열정이 넘쳤고 하나님 생각을 많이 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날카로움이 너무 많았어요. 사람들에게 강하고 날카롭게 대했고 우울한 감정도 오르내렸어요. 감정이 곤두설 때면 사람들을 아프게 했어요. 누군가 선생님에게 넌 불안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감정적 기복이 심하고 날카로워서 사람들이 너에게 가까이 가면 실망해서 떠날 거다라고 말했어요. 선택할 수 없는 가정의 영향 때문이라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 아닌가 하고 반박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죠. 그때도, 지금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성격이 모난 것 같다는 고민을 한참 하던 때라 가슴에 남아 계속 괴롭혔습니다.

순전한 기독교가 선생님을 구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 아니다라고 알고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 자체로 기뻐하신다는 구절을 봤습니다. 가난,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표현을 읽고는 너무 복받쳐서 화장실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 속에서 부르셨다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더라도 불완전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삶에서 완전히 선생님 것으로 만들기엔 너무 부족했다고 고백합니다.

선생님을 구한 다른 한 가지는 형제들의 사랑입니다. 대학 시절에 IVF 형제들이 모여서 한 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5명이 40만원씩 내고 방을 구했는데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돈을 낼 수 없었어요. 형제들이 40만원을 빌려줬죠. 거기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4학년 9월에 임용고사 준비하는데 자지러질 정도로 속이 너무 아팠어요. 형제가 저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른 형제는 에스코트하면서 병원에 데려갔어요. 위출혈이라고 하더라고요. 돈이 없어 걱정했더니 형이 우린 형제니까 괜찮다하면서 치료비를 내줬어요. 고열에 시달리면서 인사불성일 때는 곁에서 밤새 물수건으로 닦아준 적도 있어요. 하나님은 선생님이 가정에서 받지 못한 사랑을 공동체에서 누리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선생님 삶에 까마귀와 같은 사람들을 참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들은 형제는 서로 도우며 사는 거야. 시간과 비전과 육체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헌신하는 것이 기독교인이야.’라고 했습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전화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격려해줬어요.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하나님 사랑하자라고 했죠. 지금도 만나면 새벽까지 남자들이 모여 하나님 더 사랑해야 하는데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박만석 선생님을 구했고, 이제는 선생님이 이웃에게 형제가 되어주는 모습을 봅니다.

 

학교에서 천덕꾸러기인 이 아이들의 부모이자 친구인 교사가 되었습니다

임용고사에서 합격하고 포항에 발령 받았습니다. 어색했습니다. 대학 다닐 동안 가족들과 완전히 멀어졌는데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이 관심을 갖지 않아서 버림받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집에 가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에게 미안하고, 아들 친구에게 미안해서 찾아오지 못했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님 마음을 그때야 안 겁니다.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월급을 거의 다 드렸어요. 그때도 여전히 전임 사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만약 전임 사역을 했다면 집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하나님 뜻이 참 오묘합니다.

교사로 지내면서 포항에서 4학년 자폐아를 만났습니다. 똑똑한 아이여서 분모가 같은 크기의 분수 비교를 충분히 이해했어요. 6학년 졸업할 때 4학년 수준을 다 배웠습니다. 늦지만 성장하는 아이인데 중학교 가서 달라졌습니다. 아이에게 희망을 가졌지만 학교라는 공동체가 지옥과 같았습니다. ‘공부해도 뭐해요? 어차피 다 틀리는 걸이라는 말을 듣고는 학교가 지옥일 수 있겠다. 학교가 무엇일까?’ 고민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특수 학급 아이들이 자식 같다고 합니다. 특수교사로 지내면서 가장 큰 보람은 아이들과 교감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그럴 수 없을 거라는 편견으로 내버려둔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순간이 너무 좋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개판인 아이들이 삶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선생님을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를 받아 주는 곳이 여기구나 하는 신뢰를 느낄 때의 마음은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아이들과 수업할 때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이들과의 일상도 좋고 함께 지내는 시간 모두가 소중합니다. 일반 교사는 많은 수의 아이를 1년 동안 지내다가 그냥 보내는데 특수교사는 한 두 아이들과 친밀하게 지냅니다. 집안, 부모님, 아이에 대한 것을 모두 압니다. 교사뿐만 아니라 부모도 되고 친구도 되어야 합니다. 감정도 훨씬 많이 공유하고 삶을 같이 한다는 느낌, 이게 매력입니다.

정라초등학교에서 중증장애 아이를 가르칠 때 꿈을 꿨습니다. 갑자기 황지중앙으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를 찾아가서 막 울었습니다. 꿈을 꾼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를 보는데 마음이 얼마나 벅차오르던지요! 일반 교사는 이런 마음을 모를 겁니다. 무엇을 하는지 다 아니까 감정이입을 합니다. 아침에 오면 눈빛부터 다른 마음, 이런 마음 때문에 특수교사로 살아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특수 학급 아이들은 학교에서 천덕꾸러기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걸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특수교사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기독교적인 직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 특수교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고 고민했고 지금도 하지만 줄곧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좋게 평가받지 않는 아이들에게 가치 있다고 말하는 건 정말 기독교적이지 않습니까?

 

여전히, ‘기독 특수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합니다

특수교사로 10년을 지냈습니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는 특수교사가 학교에 왜 있어야 하나?’ 이런 말들이 오고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스스로도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가정방문을 갔는데 처참했습니다. 돼지우리였습니다. 교사가 아니라 사회복지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아대책 본부에 연결시키고 목욕탕 데려가고 교회 바자회에서 아이들 옷 입히고…….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없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가르치고 모든 일에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특수교사로서 일반 학교에 있다는 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변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나 아이들을 인격으로 보는 시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변했다는 이야기마저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까지 부끄럽고 가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줄곧 기독 특수교사는 무엇일까?’ 고민을 합니다.

교육과정이 지식 위주로 되어있기 때문에 특수 학급 아이들이 가치 없다는 생각이 더 굳어버립니다. 성취 기준을 낮추고 접근하면 충분히 이룰 수 있지만 소용 있나?’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지적인 영역만이 유일한 척도는 아니잖습니까! 우리 아이들도 추상적인 개념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특수학교 6학년 아이가 3월에 날씨를 배우는데 마침 눈이 왔습니다. 아이는 봄과 겨울이 싸워서 겨울이 이겼다고 말했습니다. 규격화시키지 않은 아이다운 표현이잖습니까! 이걸 귀하게 보면 아이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겠지요.

아이가 성장했다는 걸 보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배움의 공동체에서조차 일반, 특수를 분리해서 봅니다. 기독교사들은 마음이 많이 열려 있고 가장 가능성이 있어 TCF에서 통합교육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기독교사들은 확실히 아이들을 잘 포용하지만 아이를 보는 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사 단체 안에서도 특수교육을 다른 분야로 생각하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이 활기 넘치게 말합니다. “도움반 아이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 아이들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도움반 아이들도 일반 아이들처럼 배울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을 그대로 가르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음을 담은 글을 썼습니다. 아이들 자체가 다르지 않다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아주는 게 필요합니다. 아이들 나름대로의 성장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똑같이 배우고 성장하는 걸 함께 보고 싶습니다

특수학급 아이들도 성장하고 교감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만남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 어머니와 가정 이야기를 하면 아이가 눈치를 봅니다. 표현하지는 않지만 느낀다는 겁니다. 한 영역만 보고 못했다고 규정하기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중증장애인이지만 인간으로서 귀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지적으로만 판단하기엔 부족하더라도 분명한 가치를 발견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깔끔하지는 않을지언정, 관계를 가지면 고민하고, 표현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똑같이 배우고 성장하는 걸 일반 교사들이 보면서 생각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교사가 아니라 아이를 보고 기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만드는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특수 교육을 하는 동안은 내 삶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는 게 믿음입니다. ‘너 그렇게 안 살아도 괜찮다고 하지만 하나님 영광이 거기 있기에 그렇게 사는 겁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결정적 순간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수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가치가 아니라는 것에 맞서 싸우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절절하게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하나님께 박만석 선생님 칭찬해달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보셨어요? 이런 자녀가 있어서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제 곁에, 강원도 촌구석에 이런 후배가 있어서 전 얼마나 좋은지 말로 할 수 없어요!’

안타깝게도 박만석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의 반밖에 못 싣습니다. 선생님과 선생님 아내 분을 함께 인터뷰하려고 했는데 선생님 삶이 어찌나 마음을 흔드는지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과 아내 분(이정미 선생님)이 겪은 아픔을 고통의 문제로 나눌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다음에 시간을 다시 내서 이정미 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때가 또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