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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로 나아갑시다(2013.03)

역사는 분노가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사랑의 승리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너무나 큰 선물 이였습니다. 이제는 역사를 보면서 분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생명의 물고를 열어 가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학생들에게 전할 때 제 마음의 감격이 전해지는 기쁨도 맛보게 됩니다.


 



서울 광신고등학교 김두연 선생님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로

나아갑시다

 

 

 

 

/ 사진·김중훈

 

 

 

 

저는 아주 엄격한 유교적 전통을 가진 경상도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어린 나이였던 저의 형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 전도자를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으셨던 상황에서 집안의 맏며느리인 어머니가 신앙을 가지게 되어 제사 등의 문제로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감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삼십대 초반 젊은 나이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2년은 저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꿈 같이 달콤한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저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구걸을 하러온 가난한 아이들을 보면 자주 집안으로 부르셔서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따뜻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보았던 모습은 저에게는 정말 보석과 같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지금도 저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저는 아주 어려운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상황도 점점 힘들어져 갔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저는 목회자로 사역하시면서 난곡에서 야학을 운영하시는 고등학교 선배님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시대적 상황과 소외된 이웃의 아픔이 무엇인지 서서히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슨 이념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 어려운 사람들이 생길까?’, ‘사회는 이 사람들을 왜, 이렇게 대할까?’,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깊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짧은 시간 이였지만 어머니의 삶의 모습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당시 길을 잃어버린 할머니의 물건을 사주기도 했고, 때로는 그들의 고단한 모습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밥상을 대하고, 잠자리도 봐주시고 했습니다. 저는 일상적으로 자주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구로공단과 창천동 야학에서 가르치면서 사회적 모순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경찰서에서 형사들이 찾아와 야학에서 애써 모은 책상과 의자를 압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틀이나 유치장에 머물게 했습니다. ,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경찰서에서는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위험한 짓할까봐 미리 엄포를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혐의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어보았더니 혐의 없음이라고 적힌 보고서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해도 아무런 항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구로공단으로, 창천동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옮겨 다니며 야학에서 생활했습니다. 어느 날 수업 중에 전라도에서 올라온 순이라는 아이가 피를 흘리며 기절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가죽제품 공장에서 공업용 재봉틀에 왼손을 다쳤는데도 치료를 하지 못해 속옷으로 대충 붕대를 감고 있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이를 업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젊은 의사가 보증금이 없다고 치료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몹시 분노했습니다. 강하게 항변하는 저를 지켜보았던 나이 드신 의사분이 이 번 만은 받아주고 돈은 빠른 시일 내에 지불하라고 하시면서 치료해주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가난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을 조장하는 사회적 구조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저의 주변에는 영영 이념의 길로 가버린 분노한 청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은 즐겁게 노는 것으로만 생각되어 저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아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갑작스런 군 입대 그리고 먹먹한 군 생활은 저를 추운 겨울에 대책 없이 서울로 토해 버렸습니다. 저는 대학교 복학을 준비하기 위해 친척 아저씨가 하시던 작은 포장마차 가게를 임시로 물려받아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고 등록금 마감일은 점점 다고 오고 있었습니다.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저는 어느 날 절망하며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남자 친구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지금의 아내가 교회에 가지고 권했습니다. 때마침 교회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불현 듯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함께 교회로 갔습니다. 예배당 2층 한쪽 구석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로마서 5장을 설교하셨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마치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그 말씀이 저에게 다가 왔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도다.” 이 말씀에서 저는 더 이상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데 이렇게 큰 감동을 주실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날 예배 내내 소리가 날 정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배 후에 담임 목사님께서 기다리시다가 저를 사무실로 초대하셔서 따뜻한 차를 함께하면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계속되는 세종문화회관 신축 공사로 인해 골목길은 진흙탕이 되어 행인이나 손님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심하게 낙담한 채 영어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님 한분이 들어오시며 장사하는 사람이 왜 그런 책을 읽느냐?”며 핀잔을 주시더니 혼자 음식을 드시면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짧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도 대학 2학년을 마칠 무렵 집안 사정이 급격히 어려워 잠시 학업을 중단한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떠난 것이 지금까지 안가고 있다고 하시며 꼭 복학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에게는 다음 날이 대학 등록금을 내어야 하는 마지막날이 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어제 그 손님이 다시 찾아 왔습니다. 당시 등록금 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주시면서 후회 없도록 노력하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 만난 분이 주는 돈이라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습니다. 신앙이 깊은 아내는 로마서 5장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응답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후 그 분과 2년간의 교제로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세상을 향해서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하시며 제 마음의 빚을 덜어주셨습니다.

아내는 결혼의 조건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것만을 제시하고 가난한 남자에게 정말 무모하게 다가왔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결혼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 남자는 자신이 아니면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내의 인도로 저는 새문안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시는 선배 신앙인의 도움으로 저와 같은 가난한 학생을 위한 장학 사업을 작게나마 오래 동안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중간 전달자일 뿐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작지 않은 금액을 매달 쉬지 않고 보내 주었고 학생들이 졸업할 때마다 기뻐했습니다. 저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선배들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세상과 교회에 대한 저의 굳은 마음을 바꾸게 시작했습니다.

 

전공이 국어 국문학인데 어떻게 교사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대학 졸업과 함께 저는 다행히 국가 기관에 공무원으로 안착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참 어처구니없는 일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모두 세상에 대한 분노의 결과였습니다. 차라리 이념에 투철했다면 그것이 훈장이 될 수 있겠으나, 그것과 상관없었기에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말이 불씨가 되어 발생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연이 아니고 준비되지 않은 자의 불성실이 빚은 필연이었습니다. 갑자기 안정된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게 되고, 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당시 경기도 판교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준비되지 않고, 신앙도 미약한 상태에서 시작한 교직은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서울에 있는 지금의 학교를 옮겼지만 오직 성과만을 위한 삶으로 전력하였습니다. 바람직한 교사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르치기에만 힘쓴 탓에 인간적인 열매는 얻지 못해 내심 깊은 회의에 빠져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전국적으로 교사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도 그 일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실련 교육 분과에서 한 모퉁이를 맡아 진행하는 동안 교사상이 투철한 분들을 만나면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맨 손뿐임을 뼈저리게 느끼며 책임감 있는 분께 역할을 넘겨드리고 학교로 피신(?)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교직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편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학교에서 스스로 긴 고립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같은 학교재단 안에 있는 수학 선생님이 저희 학교로 전근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교무실에서는 저의 바로 등 뒤에 앉게 되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언제나 제일 먼저 출근하여 교무실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선생님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늘 예수님의 보혈을 뿌리고 다니는 손짓을 하셨고,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으로 상담하면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셨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목사보다 더 능력 있다고 칭찬하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학교는 기독교학교가 아니라 전통문화를 강조하고, 장승을 교문에 세우고 축제마다 고사를 당연히 드리는 학교였습니다. 교무실에는 열성적인 불교신자들이 있어서 폭넓게 교제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놀랍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교회에서만 예배하면 된다는 이원론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저의 눈에는 교무실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과 늘 성경을 펴 놓고 틈틈이 읽는 이 선생님이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운동장 조회를 하고 있는데 그 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 오시더니 여러 선생님들이 듣는 앞에서 놀라운 통보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 묵상시간에 하나님께서 김 선생님과 함께 신우회를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이 소리를 들은 다른 분들이 하나님은 그런 말씀도 하시느냐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그 선생님이 다른 분과 대화할 때 성경을 인용할 때면 내 심장을 작은 바늘로 찌르는 듯 짧고도 깊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저하고 의심이 가득한 심정으로 저는 정창희 선생님과 함께 신우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찬양 인도, 기도 인도, 말씀 인도, 중보기도, 영적 전쟁, 봉사를 혼자서 잘 감당하는 모습을 놀랍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하여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창희 선생님을 통해 저는 말씀 묵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묵상하면서 성경의 파노라마, 성경 주해서, 성경 강해서를 읽으며 이해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쁜 것은 묵상이었습니다. 말씀의 뜻을 살피며 내게 주신 말씀을 찾아 하루의 일상에 적용하고, 느낀 점을 깨알같이 적어가는 중에 저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습니다. 성경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을 저절로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구절구절 넘어갈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고,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부탁한 것도 아닌데 정창희 선생님과 저의 시간표는 매일 2~3시간의 빈 시간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선생님이 차를 가지고 계셔서 차 안에서 묵상하며 나누었습니다. 때로는 서로 감격하여 부둥켜안고 울고 있으면, 수업 시간에 맞추어 학생이 찾으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을 함께 지낸 후 정창희 선생님은 다시 원래 있던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믿지 않는 선생님들이 김두연 선생을 양같이 훈련시키려고 하나님이 보내셨나보다. 이제는 김 선생이 다 감당해야 하겠네?”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제가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에서 학원복음화 사역을 열심히 해오셨습니다. 사실 학교 현장에서 언제나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실천하고 싶지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기독학생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정창희 선생님이 기독교반과 신우회를 만들고 떠나면서 저를 예수전도단의 직장인 예수제자훈련학교(BEDTS)에 소개하여 입학하게 하였습니다. 10개월에 걸친 훈련을 통해 세상 속에서 제자로 사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능숙하게 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관점에서 시작하니 실수도 많았으나 기쁨이 더 컸습니다. 이후로 신우회와 기독교반, 그리고 성경공부반을 운영하면서 늘 찬양과 기도로 시작하고 묵상과 적용으로 모임을 마쳤습니다. 가방 속에는 언제나 모임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잡다한 것들로 가득 했습니다. 교무실 청소와 동료교사를 위한 커피봉사도 이어서 맡게 되었습니다. 수업 시작 전에 잠언을 활용하여 함께 교훈을 삼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제 스스로 악한 행동을 버리게 되었고, 이 때 부터는 만나는 학생 중에서 성경공부나 기도를 권유하여 기독교반이 아닌 학생들을 하나 둘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발견한 것은 찬양도 성경 그대로 가사를 삼아 부를 때 능력이 있고, 기도도 역시 성경대로 할 때 임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라고 가르쳐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 2학년과 3학년의 점심시간이 20분차이로 다르고, 매일 점심시간 그 짧은 10~15분의 나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와 바람과 더위와 추위 속에서도 갈급한 학생들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점심을 건너뛰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10년을 보냈습니다. 점심시간에 모이는 학생들은 기독교반이 아닌 학생들이어서 각 담임교사들의 견제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늘 어느 누구와도 다투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했고, 각 행정부장과 교감, 교장 선생님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최소한 장소 사용에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불의라고 생각하면 참지 못하던 유치한 성품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훈련시키셨습니다. 도저히 못 참겠다고 돌아서면 홀로 울고 있는 학생을 통해 다시 참고 일어서게 하셨고, 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책하고 숨어 있으면 학생들의 순수한 사랑의 쪽지로 격려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돌아서는 사람들도 보았고, 상처받고 주저앉는 사람도 보았지만, 연약함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잘못할 때마다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일어서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이주 노동자를 위한 사역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비전이나 애정을 가지고 계셨나요?

19년 전으로 기억합니다. 한 베트남인 청년이 손가락을 다친 채 저희 교회 사무처로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지나갔으나 1년 뒤에 보니 예배모임으로 발전해 있었습니다. 국제정치경제를 공부하면서 이주 노동자’(migrant worker)라는 용어를 배우게 되었고, 세계사를 자세히 공부하면서 이주 노동자는 이미 여러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 온 현상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한국의 경제적 위상과 이주 노동자 유입 이후에 발생할 여러 가지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주현 장로님은 자신이 미국 유학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잊지 않고 나그네를 섬기는 긍휼한 마음으로 그 베트남인 청년을 집에 데려가 치료해주고, 공부시키고, 일자리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문을 들은 베트남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예배 공동체로 정착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가 막 자라기 시작할 때 저는 찬양 인도자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17년 전이었지요. 그동안 여러 분들이 동역하셨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퇴근 후 베트남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는데, 새문안교회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헌신적으로 베트남인들을 섬기는 심종구 장로님 부부가 있어서 늘 귀감이 됩니다.

 

선교지에서 만날 수 없는 똑똑한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어느 날 전장욱 집사님이 찾아와 송우리에 가자고 강권하기에 따라갔더니 시외버스정류장에서 17개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버스를 타고내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설마 이 정도일까 하였으나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선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선교지에서 만날 수 없는 똑똑한 사람들이 한국에 이렇게 많이 들어왔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선교가 급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130분에 퇴근한 베트남인들을 찾아가 어려운 점을 묻고 예수님을 전하고 기도해주고 귀가하면 새벽 2시 그리고 아침 7시까지 출근하면서 5년을 지냈습니다. 그렇게 뛰면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각종 법률의 잔인함을 알게 되어 개정운동에 참여하고 탄원서와 법 개정 심의요청서를 작성하여 관계관청과 법제처, 국회의원실 등에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법률 속에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조항이 이렇게 많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사랑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네팔 사람들, 방글라데시 사람들, 베트남인들, 중국인들, 조선족 동포들, 인도 사람들, 나이지리아 사람들.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이런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인 저는 만나는 학생들마다 이런 사실을 알리고 우리가 할 일, 즉 이들을 선대하고 공명정대하게 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도 가르쳤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내에게 찬양 인도를 넘기고 다른 일을 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찬양에 매우 뛰어난 달란트가 있어서 지난 8년 동안 베트남인 예배를 풍성하게 은혜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국제협력 NGO 단체인 팀앤팀에서도 활동하시면서 학교에서 ‘Global Action’ 이라는 새로운 기독교반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예수전도단에서 BEDTS를 마치고 간사로 섬기고 있는 중에 이용주 선교사의 요청에 순종하여 팀앤팀1)에 합류하게 되면서 NGO와 국제상황 등의 선교와 관련된 다양한 영역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용주 대표가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세계선교관학교’(Mission Perspectives)를 도입하여 함께 섬기면서 선교의 역사, 성경의 선교주제, 선교 전략, 선교와 문화 등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인 예배 공동체를 섬기면서 알게 된 대학원 과정으로 경희대학교에서 글로벌거버넌스를 전공했습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과 세계선교관학교 과정이 결합하여 선교 동원과정’(GA : Global Action)이라는 프로그램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을 운영하면서 저는 고등학교의 학교 현장에 맞게 더 정비하여 학생들에게 적용했습니다.

6년 전부터 기독교반에는 신앙적인 열정이 있는 학생들이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찬양을 할 줄 아는 학생들은 모두 교회에 묶여 학교에서는 일체 활동하지 않으려는 학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더욱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GA(Global Action) 과정에서는 지구촌의 문제와 고통을 설명하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국제 정치와 세계사, 그리고 환경 변화와 세계 경제를 주의 깊게 공부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힌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논술과 토론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모으다가 지구촌의 고통 상황을 해결하려는 모든 활동을 글로벌 거버넌스라고 용어를 그대로 동아리 명칭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기독 학생만을 위한 동아리뿐만 아니라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관련 도서를 읽고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활동을 통해서 성과를 낸 졸업생들이 입소문을 내주어서 점차 알차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감, 교장선생님을 설득하여 학교 안에서 공식화하고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효과를 줄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무엇보다 지금 매일 27,000여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죽고 있는 세계적인 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신앙적 양심과 선교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눈을 크게 뜨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으로 너희 중에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엄중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순종의 길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굶어죽거나, 전쟁과 재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갈 뿐만 아니라 아동 노예와 소년, 소녀병사로 끌려가기도 하고, 절반 이상의 여자 아이들은 평생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이 가사노동에 묶여 있어야 하는 고통이 진행되는 지구촌의 현실을 알게 함으로써 마음을 열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 지구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성과들을 찾아보면서 학생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의 장래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진학과 진로교육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과정입니다. 무엇보다도 동아리를 지도하실 선생님이 이 비전을 품으시면 교재와 지도방법은 지도교사의 창의력에 따라 학교 현장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선생님께는 초기 준비과정에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것이며 기본교재와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학생의 리더십, 창의력, 분석력, 봉사정신, 사회성, 책임감 등등 대학이 요구하는 거의 모든 항목에 대해 자신 있게 사실을 기록할 수 있기에 이미 실시한 학교에서는 확실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이고 핵심은 고통 받는 지구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고 자신의 장래를 설계하며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것이 이 동아리의 활동 목표입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한 가지 한 가지 더 많은 프로그램을 첨가하고 보완하면서 다른 학교에도 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무엇보다 역사를 부당한 권력에 의한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보면서 분노했던 저로 하여금 모든 역사의 실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겨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역사는 분노가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사랑의 승리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 저에게 너무나 큰 선물이었습니다. 이제는 역사를 보면서 분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생명의 물고를 열어 가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학생들에게 전할 때 제 마음의 감격이 전해지는 기쁨도 맛보게 됩니다.

 

저는 분명히 우수한 교사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참을성 있게 학생들을 일관되게 대하며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하는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스스로가 정리되지 않아 괴로워하면서 교실에 들어가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무기력하게 보거나 어떤 때는 그들을 더 괴롭게 하는 교사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저는 베드로의 참회와 같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새로운 것으로 채워 주시며 격려하셔서 한 걸음씩 따라간 교직생활 20년 이었습니다. 저의 56년의 인생 중에 주님이 찾아오신 20년의 세월이 너무도 귀한 시간이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이제야말로 오직 주님의 일로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저는 6월에 서아프리카 코트디브아의 아비쟝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국제적인 선교단체들과 코트디브아르 선교에 협력하는 역할을 다하고자 합니다. 또한 지역사회를 개발하고 대학생과 청년들을 일으키는 사역에 주력하고자 합니다.

 

저는 좋은교사운동 안에서 세계의 고통을 해결하는 운동으로 확장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선교는 교사의 전문성을 최대로 활용한 선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좋은교사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분쟁과 재난과 질병과 기아로 무너진 땅에서 절망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좋은교사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 그 분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함께 나아갑시다.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 갇힌 자를 놓아주고 눌린 자를 일어나게 하며,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주님의 백성으로, 기독교사로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함께 나아갑시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