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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단절과 연속(2013.04)

좋은교사 2014. 6. 3. 17:54

정병오 칼럼

단절과 연속



교직과 군대, 새로운 시작 앞에서

나는 대학 졸업 후 2개월 반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입대를 했다. 돌아보면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제일 큰 전환의 시기였다. 일단 대학이라는 곳을 벗어나 직장이라는 사회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변화였다. 물론 대학 3, 4학년 시기를 지나면서 진로에 대한 거듭된 고민 끝에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 진출을 선택하긴 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선교 단체 훈련을 받으며 이렇게 살겠다라고 다짐했던 대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 내가 속한 직장을 변혁하는 자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큰 두려움이었다. 실제로 대학 선교 단체에서 내가 가졌던 리더로서의 지위와 권위는 초임 발령을 받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학교에서의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한 사람의 신규 교사에 불과했다.

교직 발령 후 얼마 있지 않아 입대를 한 군 생활은 이전의 대학 생활은 물론이고 짧은 교직 생활과도 단절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 지식이나 사회적 관계는 다 쓸모가 없고,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에서 몸뚱이 하나로 바닥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곳이었다. 특별히 체력이 약하고 잔재주가 없으며 삶의 융통성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적응하기에 군대는 너무 거친 곳이었다.

 

나의 치부를 가려주던 종교적 포장지가 벗겨져 나가고

하지만 교직 생활이든 군 생활이든 할 것 없이 이전의 나의 경험과 경력, 권위로부터 단절되고 바닥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은 영적으로는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다. 대학 시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나를 발견하고 말씀 묵상과 기도 생활에서부터 기독교 세계관과 신학 훈련까지 영적 훈련을 받고 영혼을 돌아보고 공동체를 섬기는 삶을 그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도 그늘이 있고 불순물이 끼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훈련되고 헌신된 영적 삶의 이면에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죄의 본성과 연약한 인격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약함들과 제대로 싸우기보다는 영적 모습 이면에 감추거나 영적인 모습으로 포장하는 위선에 익숙한 측면이 많았다. 영혼을 돌보고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헌신된 내 모습의 이면에는 세상 가운데서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는 모험을 하지 않고 영적인 공동체가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 세상을 분석하고 기독교적 대안을 만들어 내는 지적 훈련에 익숙해 있었지만 실제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대안적인 삶을 통해 작은 열매들을 맺어 가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 모습은 대학 선교 단체에 계속 있었으면 잘 드러나지 않거나 여러 모습으로 포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교직이라는 상황과 군대라는 상황에서 나의 치부를 가려주던 종교적 포장지가 벗겨져 나가고 이제 벌거벗은 상태에서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나를 세워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나를 멋있게 보이게 했던 나의 자부심들이 진정한 내가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멋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을 고백하는 그 고백 위에서 다시 모든 것을 쌓아가야 했다. 이 과정은 고통스런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정직하고 진실한 나의 기초를 쌓아가는 모험이기도 했다.

 

인생, 단절과 모험의 연속

지나고 보니 삶은 이러한 단절과 새로운 모험의 연속이었다. 결혼이라는 과정이 그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이 그랬고, 아이가 자라면서 여러 삶의 과정에서 부모에게 주는 도전이 그랬고, 새로운 교회 개척 멤버로 참여해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이 그랬고, 학교를 휴직하고 좋은교사운동 상근을 하는 과정 그리고 대표로서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과정이 그랬다. 이렇게 삶에 주어지는 주기적인 변화는, 이전의 내 경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고, 이전에 내가 쌓아놓았던 노하우와 명성과 권위를 다 내려놓기를 요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과정이 주는 영적 유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인생의 묘미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자녀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절, 그 너머의 연속

그런데 삶에 주기적으로 주어지는 단절의 경험이, 이전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바닥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경험이, 그 고통이, 단지 고통만이 아니고 기대가 되고 선물이 되는 이유는 이 모든 단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단절되지 않는 연속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연속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내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를 안아주시는 그 분의 사랑이다. 예측할 수 없는 혹은 불가항력적인 삶의 단절과 새로운 상황 가운데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불타 없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이 단절되고 사라져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면 설수록 하나님은 더 또렷해지고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주님을 의지함으로 소생함을 얻었던 그 경험은 더 큰 자산이 되고 새로운 상황에서 재기할 수 있는 든든한 밑천이자 반석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그 이전의 모든 삶의 경험과 훈련들도 완전히 단절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삶의 단절과 새로운 상황으로 인해 이전의 모든 경험과 훈련들이 아무 쓸모없는 것 같고 사라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불과 같이 다가오는 단절과 새 상황 가운데서 이전의 경험과 훈련들은 정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끼어 있는 온갖 불순물들과 위선과 자아는 사라지고 보다 온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형태로 새로운 상황에서 새롭게 쓰임을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삶에서 우리가 했던 경험과 훈련 가운데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게 마련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분주하고 무거웠던 대표라는 짐을 내려놓은 지금,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대표라는 직책이 다른 한편으로는 명예와 권력적 요소도 강했음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한 동안은 좋은교사운동 대표라는 직함이 갖는 이 명예와 권력적 독성들을 빼는데 집중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영혼으로 서려는 노력과 함께, 한 사람의 기독교사로서 이 땅의 아이들과 동료 교사, 학부모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중보하는 자로 서는 훈련을 하려고 한다. 같은 원리에서 하나님이 좋은교사운동의 대표로서 내게 주셨던 경험과 안목들도 날 것 그대로가 아닌 단절이라는 하나님의 불에 의해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점검받고 또 점검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단절된 것 같이 보이는 삶의 과정들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끊어지지 않고 절묘하게 연결될 뿐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쓰임 받는 부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라는 존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정이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과 그 분의 통치의 한 과정 속에 있음을 믿는 믿음 위에서, 이제 대표에서 물러난 한 사람의 기독교사로서, 어떻게 전 삶과 재능을 드려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고 그것을 향해 몸부림치려고 한다.

하나님이 인생을 경영해 가시는 단절과 연속이라는 오묘한 메커니즘이 새롭게 펼쳐지는 내 삶뿐 아니라 전체 좋은교사운동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