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자녀교육 앞에서의 믿음
아이의 진로와 미래 앞에서
올해로 큰 아이는 대학 3학년이 되고, 둘째는 고3, 셋째는 고1, 막내는 중2가 된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과 아이들이 크고 작은 병에 걸렸을 때 어찌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것이 제일 힘든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조금 자라서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싸워 이를 해결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이 부모에 대한 공격과 거부로 드러나고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를 보일 때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라 당황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 막내는 이 시기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시기를 어느 정도 지나 중학교 고학년과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니 이제는 진로 문제가 제일 큰 숙제로 다가온다.
대학에 다니는 큰 아이는 자신의 전공과목을 1년 정도 공부했지만 그 전공과목을 향후 직업으로까지 가지고 가야하는지 아직 확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복수전공과 부전공을 추가로 하려고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할지 확정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둘째는 입시 압박에서 조금 자유롭게 고등학교 생활을 했지만 고3이 된다고 하니 갑자기 입시 현실이 크게 다가와 많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남은 기간이라도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당위는 인정하지만 몸에 배이지 않는 공부 습관 때문에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더군다나 어떤 전공을 정해야할지는 더욱 어려운 모양이다. 부모가 권해주는 전공들은 왠지 싫고 막연하게 자신에게 조금씩 끌리는 전공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차이가 많아 멈칫거리게 된다. 셋째는 문과와 이과 중 이과를 선택했지만 이에 따르는 수학, 과학 공부 부담이 여간 무겁지가 않은 모양이다. 당연히 구체적인 전공 선택도 막연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주어진 공부하기도 버겁다는 이유로 미루어놓은 상태다. 넷째는 아직은 현실과 관계없이 다양한 진로에 대한 상상을 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고 무엇이든 잘 하고자 하는 욕심과 의욕은 있지만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은 공부 습관과 자세로 인해 부모와 종종 충돌하고 있다.
부모가 가진 정답, 아이가 가진 부담감
이와 관련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눈에는 정답이 분명하게 보인다. 내가 첫째 같으면 취업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고 지금 주어진 전공 공부를 최대한 깊고 넓게 공부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수전공이나 부전공 선택도 직업 선택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학문적 흥미와 관심을 따라 마음껏 할 것이다. 내가 둘째 같으면 지금까지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나 또 지금부터 한꺼번에 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버리고 남은 10개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볼 것이다. 그리고 부모나 어른들이 추천하는 전공들에 대해서 막연한 거부나 선입관을 버리고 조금 더 진지하게 알아볼 것이다. 내가 셋째 같으면 이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가운데서 틈틈이 이공계 관련 여러 전공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고, 교회에서 그와 관련된 전공을 한 분들과 이야기를 해가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것이다. 내가 넷째 같으면 하루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일정 정도 꾸준히 확보하면서 운동이나 취미 등 하고 싶은 일들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해 보면 아이들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아빠는 자기 마음이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아이들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겪고 있는 그 시기를 이미 겪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 충분한 경험들을 통해 그 시기를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 시기 그 문제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의 짓눌림을 스스로 벗어버리고 곧바로 달려갈 내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시기 모든 아이들이 직선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우회하여서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아이를 위한 선택이 과연 아이에게 유익했는가?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사춘기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돌아보면 나도 지극히 편협했고 나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주변 어른들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또 지금 돌아보면 지극히 지엽적인 이야기들이 크게 나를 사로잡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아슬아슬한 선택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추락하지 않고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순간순간 나와 함께 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의 수많은 잘못된 판단들과 최악의 선택, 지극히 비합리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들이 나를 조금씩 다듬어 오셨다. 그러기에 아이들을 설득하다가 지치고 스며들지 않는 대화에 좌절할 때마다 아이들의 진로와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지나온 내 인생과 함께 하셨던 동일한 하나님이 아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그 믿음을 붙든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면서 나로서는 잘한다고 했던 선택들 가운데서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좋지 않게 작동했던 많은 일들을 생각한다. 아이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우유병과 꼭지를 끓는 물에 소독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환경 호르몬의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것을 이후에 알았고, 아이 성장에 좋은 것이라도 열심히 먹였던 것이 다른 부작용을 가져온 것을 알고 후회한 적도 있었다. 아이의 특기와 적성을 살릴 것이라고 보냈던 학원이 오히려 아이로 하여금 싫증을 내게 하고 흥미를 떨어뜨린 것도 많았다. 내가 부모라고 하지만 아이들보다 인생을 많이 살았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작고 제한적이다. 내가 아이를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이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다. 내가 세상을 잘 안다고 하지만 나는 현재의 세상의 변화는 물론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잘 알지 못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의 능력을 넘어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지만 실제로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아버지시기에
그러므로 아이의 진로와 미래를 놓고 아이와 대화, 권고, 설득을 하지만 이 과정 가운데서 내 마음대로 아이가 잘 움직여주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 잡는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친히 아이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그 중심에 확신을 주시고, 그 눈을 열어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게 하며, 그 의지를 굳게 하사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했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6문의 고백 내용이 나의 삶에는 물론이고 아이들의 삶 가운데 임하길 고백하고 또 고백한다.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 라고 고백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써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심을 믿으며, 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는 믿습니다.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리하실 수 있고, 신실하신 아버지이기에 그리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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