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떠남과 책임
내가 배워야 할 것은 그 때 다 배웠다
어릴 적 출석했던 고향 교회는 장년 출석 교인이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다. 중고등부의 경우 기존 교인 자녀에 믿지 않는 가정에서 출석하는 아이들을 합해 30여 명 정도 되는 규모였다. 거기서 나는 고2 때 총무, 고3 때 회장을 맡아 2년간 봉사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이 그랬지만 우리 교회도 지도 교사가 두어 분 있어서 예배 설교와 성경공부를 인도해 주시긴 했지만, 그 외 모든 일은 임원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그래서 중고등부 자체 행사는 물론이고 중고등부가 중심이 된 전체 교회 행사의 기획과 진행, 잘 나오지 않는 아이들 심방, 주보와 회지 발간, 저녁 예배 성가대 봉사, 여름 성경학교 등 교회 행사 봉사, 운영 경비 마련을 위한 이벤트, 다른 교회와 연합 조직 운영 등을 학생들이 도맡아서 했다.
17~18세에 불과한 어린 학생들이 이 모든 일들을 감당했으니 얼마나 실수가 많고 지치고 좌절하는 일이 많았던지 돌아보면 아찔하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교회 활동을 통해 배우고 성장했으니 두고두고 감사하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주의 몸된 교회와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내려놓는 법과 나와 의견이 다른 형제, 자매들 다른 형제들의 의견에 귀 기울임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기쁜 뜻을 찾아가는 법 등을 몸으로 감으로 배웠으니 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고 축복이었다. 최소한 믿음, 소명, 사역, 공동체와 관련된 맹아(萌芽)적인 경험과 학습은 이 시기에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후배들을 놓고 떠날 수 없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정말 엉성하고 초라한 작은 모임이지만 예민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겼던 공동체이기에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했다. 그런데 고3을 졸업과 함께 그 책임을 내려놓고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내가 비록 책임은 내려놓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곁에 있으면서 후배들을 돕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가급적 교회 인근 대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해서 내 눈에 보기에 불안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후배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불행인지 감사한 일인지 고3이 되면서 성적이 계속 올랐고, 학력고사 결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 나왔다. 그리고 그 성적에 맞춘 학교 선생님들의 진학 지도와 부모님의 기대 앞에서 “연약한 중고등부 후배들을 돕고 고향 교회를 섬기기 위해 인근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겠습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 때 고향 교회와 중고등부를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대학 진학 후에도 방학만 되면 고향에 머물면서 열심히 중고등부와 후배들을 섬기며 도왔다. 하지만 대학 학년이 올라가고 대학 선교단체에서 맡은 책임이 커지면서 순수했던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아무리 공동체를 사랑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시공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내가 아무리 염려를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께 그 공동체를 맡길 수밖에 없음을 배울 수 있었다.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헌신이다
대학 시절에는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가 고향 교회 중고등부를 대체한 공동체이자 나의 전부였다. 대학 2학년 때는 우리 학년 기장과 회보 기자, 3학년 때는 회장, 4학년 때는 조장을 맡아 간사 수준의 헌신을 했다. 물론 이 때도 돌아보면 20대 초반의 어설픔과 실수, 온갖 연약함을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복음으로 어떻게 시대를 품어야 하고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시도들이 있었고, 성경공부와 신학적 기본 틀에 대한 학습과 기초를 닦았던 소중한 시기였던 것 같다.
대학 4학년을 졸업할 즈음이 되자 역시 책임을 내려놓고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밀려왔다. 공동체의 여러 부족한 부분과 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든지 후배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때는 공동체에 남거나 혹은 자주 왕래하면서 후배들을 돕는 것 못지않게, 직장과 사회에 나가 복음으로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와 후배들을 돕는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래서 공동체와 후배들을 돌보는 일에 대한 아쉬움을 내려놓고 과감하게 사회로 진출을 했고, 교사로 헌신을 했다. 대신 할 수 있는 대로 후배들을 방문해 삶 가운데서 내가 느낀 고민이나 정리된 생각들을 나누는 일에 주력을 했다.
깨끗하게 잘 떠나야 한다
교직에 나온 이후에는 처음부터 기독교사 공동체를 찾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학문연구회 교사모임 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있지 않아 처음 발족을 하는 기윤실 교사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사단체연합이 결성되고, 이 모임이 좋은교사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교육 운동체로 성장하는 거의 20년 동안의 모든 과정을 함께 했다. 그리고 최근 5년은 대표를 맡아 최종 책임자로서의 짐을 지기도 했다. 이제 대표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서 내가 떠나면 후배들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전직 대표인 나라는 존재가 후배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깨끗하게 잘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 동안 좋은교사운동을 해 오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이 친히 이 운동의 주인이시고 이끌어가는 분’이였다는 확신의 결과다.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차질 없이 해 오셨던 하나님이 후배들을 통해서도 여전히 일하실 것임에 대해 추호의 염려도 의심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주신 숙제와 책임을 따라
그렇다고 해서 좋은교사운동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좋은교사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서 틀을 유지하고 시대적 과제에 제대로 대응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이는 후배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고, 하나님이 후배들을 통해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 가운데 무거운 책임으로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은 신학적이고, 교육학적인 면에서 좋은교사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다.
즉, “좋은교사운동이라는 기독교 교사 조직이 공교육이라는 공적 영역 가운데서 기독교사운동을 한다고 할 때 그 근거는 무엇이고 어디까지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기독교 국가의 전통을 가졌던 서구 사회에서는 그 나름의 고민과 논쟁이 있었지만, 한국과 같은 선교지 상황, 다종교 사회에서의 이론적 고민은 거의 없었다. 이 고민은 교육 영역 뿐 아니라 다른 영역의 기독운동을 위해서도 필요한 고민이고, 나아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른 선교지에서도 필요한 고민이다. 이는 대표직에 있을 때도 나를 괴롭혔지만 대표로서의 일상적인 일을 감당하느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제 대표를 그만 둔 상황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숙제로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온다.
내 나이 40대 후반, 내 모든 삶의 중심을 담아 사랑하고 섬길 또 다른 공동체가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좋은교사운동이 남은 생에 있어서도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공동체일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대표직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쁘게 이 자리를 내려놓지만, 내게 주신 숙제에 대해서는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든지 관계없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감당하려고 한다.
'연재 종료 > 정병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안함과 부끄러움에서 시작하자(2013.05) (0) | 2014.06.05 |
---|---|
단절과 연속(2013.04) (0) | 2014.06.03 |
대선, 그 이전과 이후(2013.02) (0) | 2014.06.03 |
자녀교육 앞에서의 믿음(2013.01) (0) | 2014.06.03 |
삶의 어려움 속에서 붙들어야 할 것(2012.12) (0) | 201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