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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2012.5)

좋은교사 2014. 6. 3. 11:23

정병오 칼럼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나는 도덕 교사다

나는 도덕교사다. 고등학생 시절까지 한 번도 도덕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우연찮게 도덕(윤리)교육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도덕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된 이후에는 도덕 교사라는 자부심을 놓은 적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다른 과목이 아닌 도덕과목으로 불러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놓은 적도 없다.

하지만 갈수록 황폐해가는 아이들의 도덕성을 바라볼 땐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의 도덕성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은 우리나라 도덕 교육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을 느낀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도덕 교육은 모든 교사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지 도덕 교사가 다 책임져야 할 영역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아이들의 도덕성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은 도덕 교사가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경쟁 체제에 예속된 학교 교육과 사회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물질주의, 그리고 가정과 지역 공동체의 붕괴 때문이라는 것을. 도덕 교육과 도덕과 교육은 구분되어야 하고, 생활지도로서의 도덕 교육과 교과로서의 도덕교육의 영역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도덕 교사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 교사가 이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거대 담론들을 끌어들이면 들일수록 도덕 교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아무리 시대가 아이들의 도덕성을 떨어뜨리는 시대라 할지라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도덕 수업을 통해 이러한 흐름들을 늦추고 순화하는 흐름이라도 작은 열매라도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도덕 교사가 이 시대 가운데서 당당하게 도덕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가 있다.

 

나는 기독 도덕 교사다

나는 기독 도덕 교사다. 나는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해도 그 선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믿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해지려는 노력은 결국 자아만 강화시킬 뿐이며 이것이 자기 의가 되어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고백하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거듭나는 길밖에 없음을 체험을 통해 말씀을 통해 경험했다. 사람이 죄된 본성을 거슬러 참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도덕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할 때마다 갈등을 느낀다. 도덕 수업은 기본적으로 인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선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당위와, 이러한 선행을 통해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을 할 때마다 나는 과연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혹은 나의 수업이 아이들을 십자가와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아와 자기의만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하는 갈등에 휩싸이기도 한다.

물론 현 도덕과 교육 과정이 도덕의 절대 가치와 이에 대한 확신을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정쩡한 가치중립성, 그래서 어떤 가치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어떠한 도덕적 행동에 대한 에너지도 부여하지 못하는 것이 현 도덕 교육의 현실이기는 하다. 그리고 나는 수업을 하면서 인간 도덕의 한계와 도덕 너머의 세계를 언듯 언듯 보여주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 도덕 교사가 공교육 가운데서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음껏 내 속에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는 한계와 어정쩡함 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다.

 

공통의 도덕률을 찾아서

나는 믿음의 후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에 대한 고민들을 해왔다. 이들의 공통된 결론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덕률’(‘공통도덕등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을 심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도덕률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관습의 옷을 입고 있고, 또 타락의 영향으로 왜곡되게 나타나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도덕률이 각 사회에 존재했었고, 이러한 공통의 도덕률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도덕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구약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주신 이 도덕률에 근거해 심판하심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일반 역사를 보더라도 그 사회가 이 공통의 도덕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혹은 벗어났는지 하는 부분이 그 사회의 흥망성쇠를 좌우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주신 공통의 도덕률에 기반을 둔 도덕교육은 역사와 만유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실현하는 매우 소중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는 없으며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된다는 가치 상대주의의 시대에, 네가 하고 싶은 것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지체 없이 하라고 부추기는 시대에 너와 내 속에 공통으로 심겨진 도덕률을 찾아내고 그것에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작업은 이 도덕률을 창조하시고 이것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명이기도 하다.

 

나는 공교육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다

나는 공교육 가운데서 기독교인을 포함한 일반 학생들에게 도덕을 가르치라고 부름 받은 기독교사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아는 학생이든 모르는 학생이든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 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공통 도덕률을 발견하도록 어떻게 이끌 것이며, 또 그것에 순종하도록 어떻게 동기부여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기도하고 또 시도하기를 힘쓴다.

그래서 교육 과정상 어떤 주제가 나오면 교과서의 내용을 먼저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 주제와 관련해서 아이들의 피부에 제일 와 닿는 가치갈등의 문제를 아이들에게 던진다. 아이들은 모둠 토론을 통해 다양한 답들을 쏟아낸다. 아이들의 답은 대체로 내가 생각하던 공통의 도덕률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미디어 혹은 이 시대 왜곡된 가치관의 영향이 뒤섞여 있다. 그러면 나는 아이들의 발표 내용이 갖는 허점이나 모순들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대답을 다시 돌아보도록 유도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한참 거치다보면 그 문제 상황과 관련해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동의하는 가치가 도출이 된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함께 발견해낸 공통의 도덕률에 대해 놀란다. 그리고 이 가치에 대해 조금 더 마음을 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학생들이 수업 시간을 통해 공통의 도덕률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들의 인격이 되고 삶속에서 실천해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로 하여금 공통의 도덕률을 찾아보게 하고 이를 함께 확인하는 기쁨을 누려가는 과정은 아이들이 여러 장애를 넘어 이를 실천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함을 수업 평가를 통해 확인하곤 한다.

 

일반은총을 넘어

물론 나는 기독 도덕 교사로서 내 수업 가운데 이러한 일반은총 차원을 넘어, 특별은총 차원도 임하길 늘 기도한다. 그렇지만 이 특별은총도 일반은총의 과정을 충실히 수행할 때 일어날 수 있음을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서 공통의 도덕률을 찾거나 실천하기 위한 몸부림은 결국 이 공통의 도덕률을 모든 사람 가운데 심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나 그 영광의 빛에 잇닿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빛에 비침을 받을 때 사람은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나 루터의 회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