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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비진리에 대응하는 진리의 전략(2012.06)

정병오 칼럼

비진리에 대응하는 진리의 전략




 

얄밉도록 사역을 잘 하는 이단

대학 3학년 때였다. 그 때 나는 한 선교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캠퍼스에는 이단이 많았다. 그들은 보통 많은 물질적 혜택과 따뜻한 관계를 통해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했지만 동시에 당시 대학생들이 고민하던 시대적 문제에 대해서 학술적인 형태의 접근도 많이 했다. 나로서는 그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의 의도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일반 학생들에게는 그저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주는 장학 사업, 외로운 학생들의 힘이 되어주는 상담 사역, 시대의 고민에 대해 또 다른 대안을 제안하는 학술 사역으로 다가갈 뿐이었다. 그래서 일반 학생들에게 매력이 있었고 많은 학생들이 그러한 접촉점을 통해 그 이단 단체의 멤버가 되어갔다. 정말이지 그들은 얄밉도록 일반 학생들과 접촉점을 유지하면서 사역을 잘 했다.

이 단체가 캠퍼스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동아리 연합회에서 제명하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 학생들은 나에게 그 이단 동아리가 가진 교리적 이단성이나 종교적 관점에서의 부도덕성만 이야기하지 말고, 실제로 그들이 캠퍼스 동아리로 존재해서는 안 될 구체적인 어떤 잘못을 했는지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 해달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기독교 계통의 동아리는 10개 이상 등록이 되어 있었지만 이들 가운데서 동아리 연합회 회의에 꾸준히 참석하며 활동하던 동아리는 내가 속한 동아리를 포함해 한두 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단 동아리는 동아리 연합회 활동에 매우 열심히 참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동아리를 제명해야 한다는 내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

 

막말 엽서를 보내다

하루는 학교에 갔는데 이들이 학생회관 로비에서 자료 전시 및 홍보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개인적으로나 혹은 시대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를 펼쳐놓고 찾아오는 학생들을 상담하고 자료를 제공해주는 그런 자리였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 분노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영혼들을 유혹하는 이들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리를 가진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캠퍼스 친구들에게 다가가야 했는데 이단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끔 내어준 나와 우리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순간 이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서 몇 가지 질문도 던져보고 또 몇 내용에 대해서는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논쟁을 하다 보니 열을 받아서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이 주는 몇 가지 자료들을 받아왔는데, 자료 맨 뒷면에 궁금한 내용을 물어볼 수 있는 반송용 엽서가 붙어 있었다. 아직 그들에 대한 분노와 논쟁의 열기가 남아 있던 터라 그 때의 내 감정을 엽서에 써 내려갔다. 그 내용은 아주 심한 쌍욕은 아니지만 이 놈들아 제발 정신 차려라! 자신들만 거짓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거짓에 빠뜨리는 이 나쁜 놈들아!” 등의 내용을 써서 보낸 것 같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그런데 며칠 후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 하나가 나에게 이단 동아리에 막말 엽서를 보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단 동아리 회장이 그 친구와 같은 과 친구였다. 그래서 내 편지를 받은 이단 동아리 회장이 그 친구에게 나에 대해 물어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에게 받은 그 엽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자신도 그 이단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어떤 식이든 그 이단 단체의 활동을 막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나와 같이 막말 엽서를 보내는 방식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현재 이단 동아리 회장을 하는 친구가 비록 현재 그 이단에 빠져있긴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점잖고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현재 이단에 빠져 이단 동아리의 회장을 하고 있는 친구도 그 이단에 빠진 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단 동아리 회장 친구도 마음 깊은 곳에 참된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는데, 그 갈망이 이단에 미혹되었을 뿐이고, 또 언제든 그 이단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고 나에게 도전했다. 그러면서 이단을 향한 나와 같은 태도는 오히려 이단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정통 기독교에 대해 마음을 닫게 만들 뿐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진리의 힘을 믿고 있는가?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썼던 막말 편지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이 그 진리에 맞는 당당함을 가지고 그러지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세로 부드럽고 겸손한 자세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다. 내가 한 행동은 기독교의 본질이나 이 진리의 광활함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행동이었다. 아니 내 행동은 자신이 가진 진리의 힘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이단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잘못된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미혹하는 이단들의 활동에 대해 분노하고 어찌하든 그들의 활동을 막으려는 선한 열정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속에 있는 이 열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내 속에는 내가 가진 진리를 내가 지키지 않으면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복음의 진리와 이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내 속에 없었던 것은 선교에 대한 관점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온갖 비진리 속에 거하는 사람들, 심지어 미혹하는 영의 지배를 받아 참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거짓 영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 사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고, 어쩌면 참된 진리를 추구하지만 만나지 못해 왜곡된 진리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붙들고 있는 비 진리들의 허상을 드러내주고 참된 진리를 맛보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그들의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과 진리에 대한 갈망을 품어주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가진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해 주어야 하며,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언어로 그들과 대화함을 통해 복음만이 진정 그들이 바라는 바로 그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진리와 세상을 부끄럽게 할 실천의 전략은 무엇인가?

최근 들어 한국 교회 일각에서 비기독교적인 여러 사회의 제도들과 정책, 문화들과 적극적인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립학교법, 차별금지법, 학생인권조례, 레이디 가가 공연 등. 이들이 이러한 법이나 정책, 문화 가운데 있는 동성애를 옹호 요소나 복음 전파를 제한하는 부분들과 맞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옹호하고 복음전파의 제한을 제거하려는 열정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 방법마저도 기독교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는 방법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저들이 비진리로 진리를 거스르려고 할 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가지고 대화하며, 다종교 사회에서 그들의 주장과 우리의 진리를 어떤 방식으로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논의하려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당장 힘을 동원해서라도 내가 저들의 비진리를 막지 못하면 내가 가진 진리가 무너질 것 같은 인간적 조급함이 아니라 진리 자체와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당당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실천을 통해 비진리와 세상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이 스스로 굴복해오도록 하는 길에 대해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