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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성경이 말하게 하라(2012.07)

좋은교사 2014. 6. 3. 13:38

정병오 칼럼

성경이 말하게 하라


 


나는 대학 졸업하고 교직 발령을 받은 후 3개월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휴직을 하고 군 입대를 했다. 군대에 가고 싶어서 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어차피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고 또 군대라는 곳이 우리 사회의 죄악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곳이라면 반드시 경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군을 선택한 면도 있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또 힘들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입대를 했지만 역시 군 생활은 쉽지가 않았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약하고 운동 신경이 둔한 나로서는 군사 훈련과 각종 작업을 감당하는 것도 힘이 들긴 했다. 하지만 누구나 경험을 하듯 군대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내무반 생활에 있었다.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시행되는 너무도 비합리적인 관행인 구타와 기합, 최소한의 사생활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억압들은 제한된 시간이라 해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틈날 때마다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렇지만 긴 호흡을 가지고 성경을 처음부터 쭉 읽어 내려갈 여유는 없었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 당장 답을 줄 수 있는 구절을 찾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빌립보서였다. 빌립보서의 주제가 기쁨이라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고, 기쁨은 도무지 기뻐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답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기쁨을 넘어 자아와의 싸움으로

이렇게 빌립보서를 읽고 또 읽었다. 정확하게 읽은 횟수를 세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0회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빌립보서에 대해 알고 있던 상식에 근거해 감옥이라는 도무지 기뻐할 것이 없는 곳에 있는 바울이 어떤 근거로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감옥과 방불한 군대에서의 내 삶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본문을 반복해서 읽다보니 처음 내가 가졌던 관심과 관점은 사라지고 빌립보서 자체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빌립보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자아와의 싸움의 본질과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빌립보서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줄기를 잡은 후 다시 본문을 읽기 시작하니 이 핵심 줄기에 붙어있는 영적 싸움의 미세한 모세혈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말씀이 살아 꿈틀거리며 내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가 빌립보서 본문을 붙들고 각 구절들이 전체 주제를 중심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살피고, 그렇게 드러난 큰 주제와 작은 주제들이 우리 믿음의 비밀들을 어떻게 풍성하게 드러내주는지를 살피고, 또 이를 현재 우리가 당면한 수많은 삶의 구체적인 모습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그 과정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용들을 정리하고 보니 나름 완결된 성경 공부 교재가 되었다. 그래서 이 내용들을 대학 선교단체 후배들에게 보냈고, 그들은 이 교재를 가지고 그 해 1박 성경공부 수련회 교재로 사용을 했다.

군 제대 후 그 때 내가 아무런 주석이나 참고 도서 없이 반복해서 읽고 묵상만으로 집필했던 그 교재 내용을 다른 성경 공부 교재와 주석들, 설교집과 비교해 보았다. 감사한 것은 당시 내가 했던 본문 해석이 개신교 정통 주석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교재는 성경 원어나 그 시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음으로 인한 한계나 오류가 부분적으로 발견되기는 했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다른 주석이나 설교집에 없는 반짝이는 통찰들이 담겨있는 것을 보면서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성경 읽기에도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이 과정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성경 읽기나 성경 공부의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서신서나 소선지서와 같이 분량이 길지 않은 성경의 경우 그 한 권을 반복해서 읽는 것 - 그것도 두세 번 반복이 아니라 30, 50, 100번 반복해서 읽는 것 - 이 매우 유익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은 성경 읽기에도 매우 잘 해당하는 원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 성경을 읽을 때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서 그 문맥 가운데 해당 본문의 의미를 찾아가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대학 4년 동안 선교단체 활동을 통해 매일 아침 QT를 하고 그 묵상한 내용을 지체들과 나누는 생활을 하면서 성경 본문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을 지금 내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훈련이 상당히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개인 성경 공부의 원리에 대한 학습과 실습도 약간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훈련이 되어 있었기에 성경 본문을 여러 번 읽는 가운데 말씀 이해의 상승 작용이 가능했던 것 같다.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교회에서 초등부나 중고등부, 청년부를 지도하다 보면 이들에게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제법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 신우회를 인도할 때나, 기독교사모임을 하다 보면 역시 설교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 올 때 나는 최대한 신중하려고 노력을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설교자로 부름을 받지도 않았고, 또 설교자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성경 원어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본문이 말하는바 정확한 의미에 접근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설교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기 위해 그 본문에 반복적 읽기와 묵상을 계속하고 관련 서적들을 참고한다. 그 설교의 대상이 유치부 아이들인지, 청년들인지, 교사들인지 상관이 없다. 그 대상에 맞게 쉽게 설명하고 그 대상이 갖고 있는 고민과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그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내는 것은 대상과 관계없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저기서 강의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강의와 설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강의 준비는 내가 그 대상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먼저 정한 후,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내용들과 자료들을 모으고 재구성 과정이다. 그러나 설교는 다르다. 물론 설교도 내가 그 대상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성경본문을 선택한다. 하지만 성경본문이 정해진 후에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2차적인 것이 된다.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 된다. 혹 본문은 연구하는 가운데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핵심이 다르더라도 본문을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나의 메시지가 아닌 하나님이 청중들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고, 바로 그곳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설교자와 청중

본의 아니게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많이 듣게 되는 입장에서 볼 때 나는 한국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위기는 설교 강단의 위기라는 말에 100% 동의한다. 물론 이 말의 의미는 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한국 교회 가운데 성경 본문을 붙들고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설교하겠다는 자세로 성경 본문과 씨름하는 설교자가 많지 않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꼭 설교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 역시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다양한 통로를 통해 듣는 훈련과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을 뿐 아니라 분별할 수도 있고, 한국 교회 강단을 살리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