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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기도와 근심(2012.09)

정병오 칼럼
기도와 근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양재동 인근에 있는 어느 유명한 기독교 출판사 건물에 걸려있는 이 문구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이 문구는 30년 전 내가 중고학생일 때 늘노래선교단이란 찬양팀이 불렀고, 당시 기독 청소년들이 참 좋아해서 많이 불렀던 복음송가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노래나 문구의 의미나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와 죄값을 사함을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으라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소리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는 못하고 인생의 모든 질고를 내가 다 지고 끙끙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그 분께 맡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기도만 드리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일까?

그런데 요즘은 이 말을 볼 때마다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 말이 우리가 믿는 복음과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한 중요한 부분을 설명한 말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말을 바꾸어 과연 우리가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일까?” 혹은 기도를 드린 이후에도 걱정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은 것일까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모든 걱정이 사라지거나 혹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경험과 맞지 않을뿐더러 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어려움을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첫 시작이자 중요한 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도는 결코 여기에 제한되지 않는다. 기도의 시작은 내가 가진 문제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우리의 기도는 허공에 대고 나의 간절함을 표현하거나 공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인격적인 존재 앞에 나아가는 작업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빛 앞으로 점점 더 나아가게 되고 그 빛 앞에서 내 기도제목이 비췸을 받는다. 그러면 그렇게 크게 보이고 무겁게 느껴졌던 기도제목이 점점 작아 보이고 가볍게 느껴진다. 그리고 내 기도제목 속에 담겨있는 나의 이기심과 죄 된 본성이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점차 내가 가져갔던 기도제목이 어떻게 응답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도제목 속에서 드러난 자신의 죄인 됨과 작음을 고백하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소망을 품게 된다.

 

기도하면 근심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걱정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믿고 의심하지만 않으면 내가 간구한 것을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확신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확신은 자기 확신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런 방식의 확신을 주시거나 근심을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점점 더 나아가게 되면 내가 가지고 갔던 기도제목이 점점 작아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 문제로 인해 눌렸던 모든 걱정과 염려가 사라지기도 한다. 혹은 내 기도제목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려놓음을 통해서 근심이 사라지기도 한다. 내가 가진 문제가 어찌되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인해 내 근심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하면 염려가 사라진다. 분명히 사라진다.

 

세상의 근심, 하늘의 근심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 그래서 그 기도를 통해 내가 원래 가졌던 염려와 두려움을 해결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차원의 염려와 걱정이 주어진다. 기도하면 미래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미리 일정한 세상의 재화와 지위를 채워두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염려는 분명히 사라진다. 하지만 지금 내게 이미 주어진 은사와 재능을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충성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가 주어진다. 나의 욕심이나 체면, 위신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억지로 끌어들이려고 억지로 몸부림침으로 인한 피로와 근심은 사라지지만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하고 내가 영광 받고 싶어 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나의 자아와의 싸움으로 인한 탄식과 근심은 더 깊어질 수 있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안달하고 이와 관련해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힘들어하던 그 힘들어 하던 것들은 사라지지만 형제를 위해 깨어지고 연약한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를 절제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잠 못 자고 힘에 겹도록 수고하는 그 수고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나의 의를 세우고 드러내기 위해 긴장하고 날을 세움으로 인해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다치고 아픔을 겪는 일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의 추악한 죄와 싸우며 남을 판단하던 그 판단으로 먼저 나를 살핌으로 인해 내 속의 욕심과 악함으로 인해 절망하는 일은 더 늘어나게 된다.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연약한 자인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쉬 잊어버리고 조그만 열매가 있더라도 교만의 싹이 불쑥불쑥 자라고, 종교라는 가장 거룩한 외양 속에 오히려 더 추악한 죄악된 본성이 움츠리고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탄식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는 탄식을 쉼 없이 하게 된다.

 

기도의 능력, 성화의 본질

그렇지만 이러한 염려와 근심은 우리가 기도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염려와 근심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세상의 근심이 아니라 하늘의 근심이다. 죽이는 염려가 아니라 살리는 염려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러한 근심은 우리 가운데 열성과 변호, 의분, 두려워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열정, 응징을 불러일으킨다.(고린도후서 711)

그리고 이러한 염려와 근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우리를 이끈다.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주를 기뻐하시게 할까, 먹든지 마시든지 어떻게든 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그곳에 어떻게 내 관심이 집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것으로 인해 내 마음도 아플 수 있을 것인지 우리를 끊임없이 이끌어 간다. 이것이 곧 기도의 능력이고, 이것이 곧 성화의 본질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물론,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문구를 건 의도가 단지 내 욕심과 염려를 주님께 가지고 가서 떼를 쓰는 차원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구는 앞에서 내가 말한 기도의 깊은 의미와 그 기도를 통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근심에 이르는 과정을 다 담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 면에서 오해를 살 수 있는 이 문구 대신 좀 길긴 하지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9)는 성구를 걸면 어떨까 제안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