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위기의 한국 교회,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한국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20년 전부터 ‘개척 교회가 성공하기 힘들다’, ‘소형 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교인 200명 내지 300명 정도 되는 중형 교회들의 위기를 이야기해요. 이들 교회 교인들이 대폭 감소하거나 급속한 노령화를 현상을 나타내고 있어요.”
“한때 전체 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을 20%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요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죠. 실제로 대학 캠퍼스의 경우 기독교인 비율이 5%가 채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전에 캠퍼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네비게이토, UBF, CCC 등 일대일 노방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캠퍼스에서는 이런 일대일 노방 전도가 불가능해요. 이런 전도자를 범죄자 취급을 하는 분위기거든요.”
“몇 년 전 기윤실에서 한국 교회 신뢰도 조사를 매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매년 조사를 하면 결과가 비슷하게 나올 텐데 굳이 매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어요. 그런데 매년 조사를 할 때마다 신뢰 지수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위기의 본질, 비판의 이면
한국 교회 위기의 현상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원인도 분명해 보인다. 복음으로 인해 인격과 가치관이 변화되고 삶 가운데서 자기희생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는 부분에 대한 강조보다는 교회에 출석해서 헌금하고 교회 봉사하는 일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비대해진 교회는 종교 권력화, 세속화될 수밖에 없었고, 빈약해진 성도들의 삶의 능력은 세상의 가치관에 그대로 동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기독교에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고, 권력화된 종교의 구속력 아래에 들어갈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향해 세상의 수많은 비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하는데, 왜 우리와 다르지가 않느냐?’ ‘너희들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대로 살지 않느냐?’ ‘그러지 않아도 물질주의 가치관에 시달려 힘든데, 교회마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제발 교회만이라도 기독교인만이라도 이 세상의 가치관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냄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 대안적인 삶을 제시해 주면 안 되겠니?’라는 것일 수 있다. 즉, 그들의 비판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향한 절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DNA
하지만 한국 교회가 이러한 세상의 부르짖음에 응답하기 위한 자기 혁신의 길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대형 교회들과 지도자들은 중소 교회로부터 수평 이동해 오는 교인들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종교적 서비스나 종교적인 봉사에 익숙한 대다수 교인들이 자신의 인격과 삶의 구체적인 현장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영적 싸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절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추락 현상은 일정한 바닥에 이를 때까지 더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아픈 전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국 교회가 바닥을 친 후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혹은 주께서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그루터기, 거룩한 씨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씨는 이전 세대가 가졌던 종교적 열심 DNA가 아닌 인격과 삶에 체화된 신앙 DNA로 채워진 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뿌리 깊은 새로운 신앙의 전통을 만들어 갈 수가 있고, 그럴 때에야 한국 교회가 좀 더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이야기하는 대화 시간을 확보하는 일부터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추락으로 인해 아픈 가슴을 가진 사람들은 가정으로 달려가고 가정에서 믿음의 후손을 양육하는 일에 최우선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으니 우리 가정과 자녀만이라도 지키자는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발상이 결코 아니다. 한국 교회의 실패가 신앙이 삶에 체화되지 못하고 종교의 껍데기만 남은 것이라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인격과 신앙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훈련되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녀의 삶과 인격 속에 체화된 신앙 DNA 역시 가정에서 부모의 신앙 인격과 부대끼면서 제대로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핵가족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매일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빠도 최대한 직장 일정을 조정해야 하고, 자녀의 학원 일정도 조정하고 공부시간도 줄여야 한다. 이렇게 매일 온 가족이 일정 시간 모여 같이 웃고 삶을 나누고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이 전수가 된다. 이 시간을 통해 아이들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이야기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이 땅의 좋아 보이는 유한한 것을 포기하는 삶을 배우게 된다. 이뿐 아니라 교인들의 사정이나 세상의 뉴스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교인들과 세상을 위해 중보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획득할 뿐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품는 중보자로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그들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나라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도가 급감하고 성적, 도덕적 규범이 해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오는 철저하게 삶에 체화된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그 사회와 교회를 유지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건한 믿음의 가정과 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교육의 전통, 그리고 그들이 품어 내는 깊은 신앙의 감화력과 영향력은 비록 숫자적으로 많이 줄었다 할지라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 내려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겉으로 보기에 미국과 유럽 교회가 쇠락해 가는 것 같지만 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그루터기와 거룩한 씨를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한국 교회의 교회 출석률이 높고 교회의 재정이 많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외적으로 보이는 표지를 가지고 미국이나 유럽 교회를 판단해서는 안 되고, 이들을 걱정할 처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수천 년을 이방 가운데 흩어져 살면서도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 전통 하나를 붙들고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 온 유대인의 예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물론 신앙의 연륜이 짧고 이마저도 물질주의적인 종교의 틀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교회 가운데 속한 우리가 의지만으로 이를 따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위 의식이 있다 하고 한국 교회의 미래를 염려한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외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자리에 서 있거나 혹 이에서 지나쳐 냉소주의에 빠져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교육의 실체를 놓쳐 버린다면 이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무서운 책망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위기를 보되, 수천 년을 흘러온 세계 교회의 역사에 비추어 이 위기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돌파해 내기 위해서 정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나와 우리 가정부터 이를 붙들고 씨름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씨름에 정면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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