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
그 길이 확실한 건가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고3 학력고사 시험 이후 대학 원서를 쓰기 위한 면담을 할 때였다. 지금이야 대입 과정이 여러 대학에 여러 번 지원할 수 있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갖고 있지만 당시에는 학력고사 점수와 내신 성적을 합산한 점수를 기준으로 하나의 대학에만 응시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단 한 번밖에 기회를 주지 않는 매우 냉정한 제도였지만, 이미 서열화된 대학 체제 가운데서 자신의 점수를 전국 등수화 해서 학원에서 만들어 준 배치 기준표에 의거에 지원을 하면 되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 속 편한 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랜 입시 경험을 가진 고3 담임 선생님이 안전하다고 제시해 주는 대학과 전공에 안전하게 원서를 쓸 것인가 아니면 재수를 각오하고라도 내 점수보다 조금 더 높은 대학과 전공에 소신 지원을 해볼 것인가만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재수할 각오도 형편도 되지 않았던 나는 선생님이 권해 주시는 안전권에 있는 대학과 전공으로 원서를 쓰면서 선생님께 “그러면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대학 그 과에 지원하면 합격이 확실히 보장이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선생님의 답은 “병오야! 합격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할 수가 없는 거야”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이 답변은 지극히 상식적인 답이었고, 당시 내가 받은 충격은 매우 큰 것이었다. 마치 내가 딛고 서 있는 모든 확실성들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나는 충분히 합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 1지망 전공에서 불합격하고, 내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2지망에 합격했고, 그 2지망이 오늘날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한다. 어떤 확실한 것을 보장받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는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내 삶의 안정과 확실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배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정이요 확실이라는 사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반석이자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은 그야말로 영원과 영생에 대해서는 확실한 소망의 안전판이 되어 주시지만 현재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만(로마서 8:28) 반면 현재 주어진 선택의 상황 앞에서는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존재들이다.(로마서 8:26)
우리는 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시기만 하면 그것이 고난이든 광야든 아프리카든 순종하겠다는 믿음이 좋은 듯한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그러한 기도야말로 하나님 자신이 아닌 안전판을 추구하는 죄된 본성이라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은 모든 것이 불명확한 현실 가운데서 지금까지 내가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선한 뜻에 바탕을 두고, 여러 선한 모양의 가면을 쓰고 나를 유혹하고 있는 죄된 본성들과 싸우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불확실함 속으로 한 발 짝씩 발을 내디디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제일 큰 걸림돌
그러므로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제일 큰 걸림돌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해서 실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기 때문에 실수를 깨달으면 돌이키고 그 상황에서 다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 된다. 오히려 진정한 위기는 불확실한 현실 가운데 나름 믿음의 결단을 했고 그 결과 내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큰 복을 받았을 때 온다. 이 경우 지금 내게 주어진 이 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임을 잊지 않고, 그 상황에서 마치 내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원점에서 다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또 다른 불확실한 세계로 믿음의 발걸음을 계속해야 하는데,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나의 기득권으로 움켜쥐고, 이 복을 놓지 않는 전제 하에서 다음 길을 모색한다. 그렇게 되면 그 복을 받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그 복보다 더 나쁜 상태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제쳐 버린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안정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이 안정은 버릴 수 없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미 이 안정은 그 사람에게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다.
확실함의 기초가 무너질 때
잘 아는 후배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제법 크고 안정된 교회의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퇴임 목사님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이 젊은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의 도움으로 공동 의회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런데 목사 이취임식 후 원로 목사님은 이 젊은 목사님을 불러서 “00 목사, 여기까지는 내가 도와주었지만, 지금부터는 교인들의 신임을 얻는 것은 자네 몫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이 이미 얻었고 안정권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큰 교회 담임 목사직의 기초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은혜로 얻은 이 담임 목사직을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노력하는 순간 어떤 식이든 자신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회가 교인들을 제대로 세워 가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담임 목사직을 내려놓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교회 담임 목사직보다 더 영원하고 안정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의 풍요로움이 보이고,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목회를 할 수 있었더라는 것이다.
영원한 안정과 확실함을 위하여
갈수록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안정과 확실을 간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삶 가운데 기도 제목들이 하나씩 응답이 되고, 삶의 안정과 확실성이 쌓여 갈수록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안정성은 더 위험한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생의 딜레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내게 없는 것,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불확실함과 불안에 주목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 내게 있는 것, 작지만 내가 부여잡고 있는 그 무엇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 작은 안정이라도 버리고 원점에서 오직 주님만 의지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지금 주어진 이 작은 안정과 확실함을 붙들려는 죄된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그 무엇 하나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확실함과 안정을 갖지 못했을 때가 오히려 가난함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안정과 확실함 속에 제대로 거할 수 있는 길임을 생각하고,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반석이 되신 하나님으로만 인해 평안을 누리는 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허락하셔서 물질과 관계 가운데서의 풍요로움과 안정을 허락해 가실 때 우리는 더욱 긴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내게 허락하신 물질과 관계의 안정이 나의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웃을 섬기는 일에 쓰고 쓰면서 거룩한 허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 주께서 이 복과 안정을 수거해 갈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영적으로는 날마다 빈손으로 주 앞에 서 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정과 확실함으로 더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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