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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논쟁자 루터, 그리고 나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6. 13:18

논쟁자 루터, 그리고 나

 

 최근 루터에 푹 빠져 있다. 한글로 번역된 그의 저작들은 물론이고, 그의 신학이나 사상과 관련된 연구 글들을 읽어 가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영적 거장의 실체를 느껴가노라면 어떤 때는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랐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한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훈련을 받았다. 그것도 그냥 그 물에서 논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로교회나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신학과 세계관을 깊게 파고 들어가고, 그 신학적 전통에 나를 맞추고 그 세계관에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니 골수 칼빈주의자인 셈이다. 대학 시절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처음 읽었을 때의 그 흥분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화란의 신칼빈주의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신학과 철학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이 사회를 변혁시켜 가는 삶을 살겠노라던 그 결심들이 여전히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교 개혁을 생각하더라도 내 머리 속에서의 루터는 가톨릭에 대비되는 개신교의 새로운 신학 체계를 만들어 낸 신학자나 사상가의 이미지가 아닌 혁명가나 행동 대장의 이미지였다. 거기에 비해 칼빈은 루터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신학적이고 학문적으로 완성한 신학자요 사상가의 이미지였다. 루터가 중세의 잘못된 우상들을 파괴한 사람이라면, 칼빈은 그 폐허 위에 종교 개혁의 실질적인 내용을 건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유럽 교육과 복지의 근본, 루터 신학

이러한 내가 루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9년 1월 북유럽 교육 탐방단의 일원으로 스웨덴과 핀란드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이때 든 생각은 ‘이 나라 국민들이 지금 교회 출석에 대한 열성은 많이 약해졌지만, 이 나라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나 교육, 고용, 투명성 등에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는 인간관이 깔려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인간관에는 루터의 신학이 지대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북유럽 복지 국가들이 대부분 루터파 교회가 지배하던 곳이고, 루터의 신학에 기반을 두고 사회를 형성하고 운영해 온 나라라는 사실이 번뜩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생각은 2011년 1월 좋은교사운동 북유럽 교육 탐방단과 함께 핀란드와 덴마크를 보면서도 더 분명해졌다.

이후 루터의 저작들을 살펴보니 국가가 학교를 세우고 지역의 모든 아이들을 무상으로 교육하되, 성경과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여러 영역들과 인문 고전들을 가르쳐야 함을 이미 설파해 놓고 있었다. 실제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루터의 이 가르침의 바탕 위에서 공교육이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그의 가르침이 이들 나라의 교육 철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이 교육 철학은 오늘날 공교육 가운데 기독 교사 운동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인 함의도 충분히 주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신학적인 면에서 있어서도 루터는 혁명가나 실천가로서 구호나 명제만 외친 사람이 아니라 개신교 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뼈대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로 모든 주제들에 대해 신학적 논문의 형태로 매우 엄격한 논증을 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문판 루터 전집이 55권 분량이라고 하니 그의 저작의 방대함을 짐작할 수가 있고, 내용 면에서도 구원론, 율법과 은혜의 관계, 예배와 성례, 교회의 직제와 정치, 세속 국가와 교회의 관계, 만인제사장설과 직업 소명설, 가톨릭과 교황제에 대한 비판 등 기독교와 관련된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 섭렵하고 있다.

 

말씀 연구를 통해 기른 영적 근력

어떻게 연약한 한 사람이 그 거대한 교황의 물리적 힘과 잘못된 신학적 전통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싸움을 하면서 동시에 개신교의 새로운 신학적 내용과 종교적 틀을 세워 갈 수 있었을까? 또한 그 와중에 어떻게 이 많은 저작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루터의 저작들과 그에 관해 서술한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루터가 ‘논쟁자’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를 ‘논쟁자’로 규정한 것은 그의 성격과 관련한 말이 아니고 그의 삶을 관통하는 인생의 특징,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그 삶의 소명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루터에게 자신의 양심에 주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민감함을 주셨고, 동시에 그 문제를 풀어 나가는 근본 기준으로서 성경을 사모하는 열심을 허락하셨다.

우리가 알다시피 논쟁자로서의 그의 민감함은 처음에는 그의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 문제와 관련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문제와의 싸움은 루터로 하여금 성경 연구에 몰입하게 했고, 여기에서 루터는 이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이후 그에게 주어지는 종교 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된다. 루터는 1512년 10월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513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 교수로 있으면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연속해서 강의하면서 말씀과 씨름한다. 이 시기에 루터의 신학적 기반들이 거의 완성이 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한 95개 조 반박문을 붙였을 때 그는 가톨릭 교황 체제에 도전할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이해한 말씀에 근거해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에 대해서만 논쟁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반박문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갔고,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루터에게 이 반박문의 취소를 요구하면서 여러 논쟁의 자리와 종교 회의로 그를 불러낸다. 그러면서 루터는 면죄부뿐 아니라 행위와 성인 숭배, 연옥 등으로 버무려진 중세의 구원론의 문제, 세속보다 더 타락하고 권력화된 교황 체제, 우상 숭배의 요소가 많이 가미된 미사 문제, 성속 이원론에 기반을 둔 성직주의 등 중세 가톨릭 체제 전체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에 근거해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1518년 중세 가톨릭 교회가 갖는 전반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학의 핵심인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발표한다. 그리고 1920년에는 종교 개혁 3대 논문으로 불리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한다. 이 논문들에서 각각 교황 체제의 문제점과 개혁 방안, 7성례로 대표되는 가톨릭 미사 제도의 문제점과 개혁 방안,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문제 등을 정리하게 된다. 수도사와 수녀들에게 언약 파기에 대한 자유를 주고, 세속 직업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 『수도원 서약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판단』도 이 시기에 발표된다.

 

성경적인, 너무도 비정치적인

이렇게 가톨릭과의 논쟁을 통해 기존 가톨릭 신학과 지배 체제를 부정하고 종교 개혁의 물꼬를 트자 이제는 백가쟁명식으로 진행되는 종교 개혁 흐름의 질서를 잡고 뼈대를 세우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루터는 주저하지 않고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푸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지 정치적인 고려를 해 나갔다면 그는 둑이 터진 댐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과 같은 수많은 시대적 과제를 일관성 있게 풀어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말씀이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상황을 풀어 가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파문을 당한 후 신변 안정을 위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다가(이 기간에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독일 농민 전쟁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이 세속 권세를 세운 의미는 무엇이고,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고, 어디부터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답을 찾기 위해 고심을 한다. 그 결과물로 『세속 권세,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충고 : 소요와 난동을 막으라』, 『평화에의 권고 : 쉬바비아 농민들의 12개 조항에 대한 답변』,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 『군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등의 저작이 나온다. 이러한 일련의 저술에 근거해 루터는 농민 전쟁에 반대했고, 오히려 세속 군주들에게 농민 반란을 진압하라고 독려함으로 다수의 농민들과 농민 전쟁을 옹호했던 사람들과 결별하게 된다.

곧이어 루터에게 온 도전은 에라스무스를 필두로 하는 인문주의자들과의 논쟁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가톨릭의 문제에 대한 비판에서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과 입장을 같이했고, 특별히 인문주의자들이 번역한 성경과 고전은 종교 개혁의 든든한 밑받침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인간 이성과 자유 의지의 역할, 선행의 문제에 있어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 의지의 자율성을 강조한 반면,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 이성은 무익하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논쟁은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입장을 비판한 『자유의지론』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루터가 『노예의지론』을 씀으로 격렬하게 진행이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된다.

이어 루터는 성만찬 논쟁에 참여하게 된다. 루터는 이미 『교회의 바벨론 포로』, 『새로운 언약에 대한 소고 : 거룩한 미사에 관하여』 등에서 가톨릭의 화체설(성찬의 떡을 받는 순간 그 떡이 실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을 비판하고 이들과 결별한다. 하지만 루터는 공관 복음과 고린도전서 11장에 나타난 “이것은 내 몸이다 … 이것은 내 피다”는 말씀 앞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 결과 루터는 성찬의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 가운데 실제적으로 임한다(공재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이것은 내 몸이다”를 “이것은 내 몸을 의미한다”로 해석한(상징설) 쯔빙글리와 칼 슈타트를 비롯한 다수의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루터는 쯔빙글리 등이 주장한 상징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내 몸이다”는 그 말씀 앞에서 종교 개혁 진영의 분열을 감수하면서도 공재설을 유지한다.

종교 개혁 진영 내에서의 이와 같은 논쟁과 분열의 과정 가운데 루터가 취한 입장들은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분열되었어야 했는가 하는 부분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당시 루터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이해한 말씀에 근거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전혀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루터가 종교 개혁의 아버지자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라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논쟁자 루터 앞에 선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중세 가톨릭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가 없다. “현재 한국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했다”라고 절규한 손봉호 교수님의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약간의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놓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부터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말하는 것이라면 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철저하게 순종하며 외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씀에 비추어 심각하게 잘못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합리적인 이유를 들며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 열심이 자신을 삼켰다는 논쟁자로서의 자세가 결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10월 31일 종교 개혁 기념일을 맞으며, 내가 붙여야 할 반박문은 무엇이고, 내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내가 이 시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외치고 나서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더욱 고민하게 된다.

 

* 루터의 저작을 직접 읽어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95개 조 반박문』, 『하이델베르크 논제』, 『그리스도인의 자유』, 『로마서 강해 서문』, 『세속 권세,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가』부터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