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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이것이 인생이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16. 10:38



정병오 칼럼
이것이 인생이다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것들

 가끔 대학 생활을 돌아볼 때가 있다. 그런데 늘 처음 떠오르는 그림은 대학 1학년 때 극심한 막막함과 외로움으로 향수병을 앓았던 일, 2학년 때 교회 친구와의 오해를 풀지 못해 며칠 잠 못 이루고 괴로워했던 일, 3학년 때 선교 단체 대표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던 일, 4학년 때 졸업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놓고 방황했던 일 등이다. 분명히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대학에서 만났던 소중한 만남들과의 아름다운 기억, 또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런 것들은 약간의 의도성을 가지고 생각을 해야 떠오르지 본능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교직 생활을 돌아봐도 비슷하다. 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아이는 나한테 반항하고 대들었거나 아이들의 여론을 몰아 나를 대적했던 아이들이다. 멀쩡한 아이를 도둑으로 모는 등 내가 큰 실수를 했던 시간이나 아이들 간의 싸움을 중재하다가 학부모에게 폭행을 당할 뻔 했던 위기의 시간들, 아이들의 소란함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수업을 포기하는 수준까지 갔던 힘들었던 시간들도 먼저 떠오른다. 부족한 나를 좋아해 주고, 부족한 나의 가르침에 감동하고 영향을 받던 아이들, 그 아이들과 함께하던 즐거웠던 시간들은 늘 그 다음이다.

 영적으로도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죄악으로 인해 주 앞에서 책망받았던 경험들이다.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고 이를 수습할 수 없어 주 앞에 엎드리기만 하던 시간이 생각난다. 찬양과 감사가 아닌 부끄러움과 상한 심정으로 나아갈 때가 더 깊은 흔적으로 내 영적 나이테 속에 새겨져 있다.


그 인생의 반영이 아닐까?

 왜 그럴까? 내 성향이 부정적이어서 그럴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시편을 묵상하다 보면 절반 이상의 시들이 탄식과 부르짖는 시들이다. 시편이 우리 인생이 겪는 삶의 모든 여정들과 경험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고 할 때 이렇게 탄식과 부르짖는 시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경험하는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경험들이 그만큼 중요하고 삶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어디 시편뿐이랴?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의 내용을 보더라도 인생의 고통과 그 가운데서 주의 구원을 요청하는 가사들이 주를 이룬다.

 다윗의 시편이나 선지자들의 예언서나 이후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찬송과 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생의 고난과 환란은 결국 그들이 살았던 삶의 경험의 반영일 것이다. 시편의 주 저자인 다윗의 생애만 보더라도 그에게 닥친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위기와 고난의 사건들, 그의 실수와 죄악으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아픔들, 거절당한 기도와 한계의 경험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이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무거운 역사적 짐들, 이러한 것들이 그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 평안과 안정은 이 고통을 극복한 결과로 주어지거나 이 고난과 고난의 사이에서 하나의 쉼표로 주어지거나, 아니면 고통 가운데 만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과정에서 주어진 결과였다.


인생 곡선의 꼭짓점들

 얼룩말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무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 바탕에 흰 무늬를 가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기쁨과 평안이라는 일상 가운데 가끔 고통과 환란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환란이라는 일상 위에 기쁨과 평안이라는 휴식이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적인 시간의 길이나 경험의 횟수 면에서는 기쁨과 평안의 시간이 더 길고 많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나 영향 면에서는 기쁨과 평안의 시간이나 경험은 고통과 환란의 시간이나 경험을 당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평범한 우리의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더라도 분명히 고백할 수 있다. 누구든 인생 곡선을 그리라면 그 인생 곡선의 대부분의 꼭짓점들은 고통과 환란의 시간들이고, 그 고통과 환란의 꼭짓점들을 연결하면 내 인생의 뼈대가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통과 환란을 정점으로 연결된 뼈대 위에 수많은 내 인생의 기쁨과 안식의 경험들, 그리고 성장과 열매들이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 고통과 환란의 뼈대를 부인한다면 그 인생의 존재 기반이 사라지는 것이다.


왜 과거는 되는데 현재와 미래는 안 될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인생의 본질과 고통의 의미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정리를 과거의 내 삶을 돌아볼 때만 적용하고 현재 내가 겪는 고통과 아픔, 그리고 미래의 내가 헤쳐 나가고 선택해야 할 막막함과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잘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전 고통의 상황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했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하는 고난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과거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을 과거의 고난 가운데서 나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전조등으로 비추어 보기만 해도 이 고난과 염려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안목을 얻으며, 이 가운데서 실수하거나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는 영적 감각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비결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과 염려, 실패와 좌절, 외로움과 거절이 우리 인생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육체의 한계, 완전히 죽지 못한 자아와 죄의 본성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에게 이러한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어려움이 없다면 어떻게 인생이 이 땅을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이 삶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으며,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소망을 계속해서 간직하며 키워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구원받은 우리 인생도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가 계획하신 온전함을 성취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넘어 산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고통과 염려, 두려움을 만날 때 마치 내가 겪지 않아야 할 일을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호흡하고 밥 먹고 잠자고 이야기하듯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고난만 지나가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내려놓고 이 고난이 지나가더라도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 다른 모양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하고 조급하게 이 고난을 피해갈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이 고난이 내게 요구하는 충분한 인내의 분량을 채워 가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고통과 염려,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이러한 일을 내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분별하며 내려놓고 낮아지며 기다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깊은 뜻을 분별하며 내가 더 겸손해지는 과정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고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고통이 지나가고 해결된 이후의 기쁨도 인생의 소중한 낙이지만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비밀을 깨닫는 것은 유한하고 흠 많은 나그네 인생길을 제대로 살아 내는 정말 중요한 비결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