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만 아낄 수는 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올해 90이다. 나이 90이면 아무리 정정한 사람이라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나이다. 이러다가 제대로 선생님 얼굴을 뵙지도 못하고 천국으로 보내 드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만사를 제치고 기자의 취재에 동행했다.
녹취를 해 놓았어야 했는데
부산에 도착해 선생님께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분명히 기자가 3번 정도 미리 통화를 했다는 데도 말이다. 할 수 없이 주소를 가지고 집을 찾아가니 기자와의 통화 사실조차 기억을 못하신다. 다행히 내 얼굴은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셨다.
기자가 준비한 질문을 내가 대신해서 질문하는데, 어떤 질문을 던지든 관계없이 몇 가지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김기열 선생님께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선생님의 모든 이야기를 녹취를 해 두려고 했던 계획들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2년에 태어나 1940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해 1986년까지 47년간을 교직에 몸담았고, 퇴직 후 20년 동안은 사회 저변층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대안 학교 사역을 해 오신 김기열 선생님의 삶에는 한국 교육사와 더불어 기독 교사가 어떻게 이 시대 가운데서 살아야 할지가 오롯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대와 역사의 조건 속에서 한 사람의 기독 교사로서 어떻게 아파했고 씨름해 왔는지의 과정을 평전 형식으로 정리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질문의 내용과 관계없이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하는 그의 말을 그냥 기억력이 퇴화된 한 노인의 무의미한 반복으로 치부하지 않고, 어쩌면 그 반복되는 말 가운데 선생님의 90 평생이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 기울이고 또 귀 기울였다.
땅에 한 스승 계셨네
선생님이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윤인구 선생님’이셨다. 윤인구 선생님은 1903년생으로 일본 명치학원 신학부와 미국 프리스톤 신학대학원을 거쳐 영국 에딘버러 대학원을 수료한 엘리트였다. 28세에 귀국한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복음농업학교(현 창신고등학교) 교장, 부산대학교 설립 및 총장, 연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분이다. 김기열 선생님은 초등학교 졸업 후 복음농업학교에서 윤인구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집이 가난해 윤인구 선생님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때 보고 배웠던 윤인구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이 소년 김기열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던 모양이다.(윤인구 선생님은 1987년에 소천하셨고, 김기열 선생님은 윤인구 선생님의 유고 글을 정리해서 『땅에 한 스승 계셨네, 그의 참 삶, 그의 옳은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펴내셨다.)
예수 정신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세
다음으로 선생님은 ‘예수 정신’, ‘함께 더불어’라는 말을 계속하셨다. 이 말은 김기열 선생님의 인생철학이나 교육 철학을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김기열 선생님은 복음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진주사범학교를 거쳐 1940년 19세의 나이에 경남 산청초등학교에 부임한 이후 경남 단계초등학교, 부산 토성초등학교, 경남상고, 부산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부산이사벨여중고 교감, 교장, 부산해양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정윤고등학교(현 하남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이렇게 교사 생활을 하시면서 자신을 향해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끊임없이 하신 말씀이 “예수 정신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세”였다.
2층 김기열 선생님의 방에 올라가니, 교사 시절 손으로 작성했던 자료들이 한 방 가득 쌓여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가정 방문록이다. 아무거나 한 파일을 꺼내 보니 부산여고 18회 3학년 1반 가정 방문록인데, 69명의 학생에 대한 가정 방문 과정과 받은 인상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 옆을 보니, ‘함께 더불어’라는 표지 제목으로 매일 아이들에게 한 훈화 기록장이 있다. 거기에는 매일의 시사적인 내용에서부터 아주 세밀한 생활 지도, 신앙, 미래, 꿈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선생님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교문 입구에 있는 칠판에 백묵으로 새로운 훈화를 적었고, 나중에 그 내용을 1주일 단위로 정리해 등사를 해서 현재 아이들뿐 아니라 졸업생들에게도 발송했다고 한다.
제자들 소식이 담긴 신문 스크랩도 눈에 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으로 박찬종 전 국회의원, 성우 고은아가 있고, 이회창 총재의 부인인 한인옥 여사도 있다. 선생님은 제자들 소식을 늘 스크랩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전화해서 격려와 훈계를 해 오셨다. 군부 독재 시절 대학에 진학한 제자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면 감옥도 자주 찾아 다니셨다. 나도 선생님의 그 스크랩 및 격려와 훈계의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예수 정신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던 선생님의 관심은 당신이 맡은 학교 아이들과 졸업생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교사 시절부터 부산 및 김해 교도소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서 주말 시간을 사용했다. 이렇게 십 수년 동안 계속된 소년원 사역은 정년 퇴임 후 국제기능인선교학교의 교장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기능인선교학교는 불우 청소년들에게 복음과 기술과 선교를 가르쳐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에 기능인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을 목표로 한 학교였다.(지금은 ‘로뎀청소년학교’라는 이름으로 가정 법원 수탁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학교에 무보수 교장으로 취임한 선생님은 특유의 열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먹고 뒹굴고 교육하면서 때로 노구의 몸으로 선교 현장을 누비면서 20년 이상 사역을 해 오셨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구석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가 반복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집구석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그가 교사 시절이나 교감, 교장 시절이나 나중에 국제기능인선교학교(로뎀 학교) 시절에도 늘 입에 달고 지내던 말씀이었다. 그만큼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했고, 복음이 들어가면 인생이 바뀔 수 있음에 대한 확신으로 생활했다.
한국 교회, 그 중에서도 쇠약해져 가는 농촌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해 부산 영락교회 장로로 계시면서 매 주일 오후에 경남 일대 농촌 교회들을 방문해 의료 봉사 등을 하고 농촌 교회의 어려운 실태를 조사해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교육자선교회 조직확장지도위원장을 맡아 전국을 누비면서 지부 설립을 돕기도 했다.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가야지
그를 만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주어진 한 인생의 기간 동안 보통 사람 서너 배 이상의 삶을 살아 냈던 그가 살아왔던 시간들과 동시에 육체의 건강과 기억력이 상당히 퇴조되어 이제 자신의 삶을 가누는 것 외에 더 이상의 다른 사역을 하기 힘든 선생님의 현재의 삶이 교차되면서 만감이 오갔다. 하지만 육체의 건강과 정신적 기억력이 상당히 퇴조된 선생님의 모습이 불쌍하게 여겨지거나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의 90에 이르기까지 주님이 주신 뜻을 따라 자신을 마음껏 불사르고, 이제는 육체의 수고들을 쉬고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는 최고의 복을 누렸고 누리고 있는 삶으로 다가왔다.
누구도 세월을 이길 사람이 없지만, 세월을 아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세월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 많은 이 세상,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괜히 나이 들었다고 뒷짐 질 생각하지 말고, 그 나이에 맞는 현역의 삶의 터를 찾아 더 부지런히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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