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평범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지 마라
“선생님, 제가 중학생 때 청운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제가 우리 직원들의 생활을 어떻게 알겠으며, 또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제가 비록 아버지 덕에 주제넘게 부를 누리고 있지만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마음속에는 늘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친구들, 중학생 시절의 격의 없이 어울렸던 그 시간이 없었으면 어떻게 지금까지 우정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만났던 첫 학교 시절의 제자들 모임에서 대재벌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견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아들이 한 말이다.
평창동 아이들
내가 첫 발령을 받아 근무했던 청운중학교는 경복궁과 청와대 옆에 위치했었다. 그리고 재벌들과 부자들이 많이 사는 평창동과 구기동을 학군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권력층의 자녀들과 부유한 자녀들이 이 학교에 많이 다녔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 씨,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씨, 현대 그룹 고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 등의 인물이 학교에 다녔고, 그들이 다니면서 남긴 에피소드들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근무를 하던 1990년 초반에는 권력가와 재벌들이 강남으로 많이 이사를 간 후라 이들 자녀의 재학 비율이 조금 줄긴 했지만, 그래도 현대가 손자 2명을 포함해 유명 재벌의 자녀 혹은 손자, 유명 연예인이나 권력층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에 이런 재벌가나 권력층 혹은 유명인들의 자녀가 많이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 근처 청운동, 효자동이나 세검정 지역에 사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유한 가정 출신의 아이들 가운데 학교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들 대부분이 사립 초등학교 출신이라 그나마 초등학교 때는 일정 생활 수준 이상의 아이들만 보다가 중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생활 수준에 있는 아이들에게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중학교 교실 환경이라는 것이 여느 평범한 중학교와 다름없는 먼지 구덩이 낡은 교실에 50여 명의 아이들이 생활해야 하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많이 타봤는데 기차는 처음 타요
거기다가 아이들에게 자신이 재벌 2세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전혀 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분명 학교 마치고 교문을 나서면 자신을 태우러 온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고, 저녁에는 아빠를 따라 나비넥타이를 매고 호화 만찬에 참여해서 재벌 2세로서의 대우를 받는데, 학교에 오면 그런 대우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친구의 집안 형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품성과 친절함, 리더십을 보고 반장을 뽑다 보니, 이런 것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반장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같이 청소 도망을 쳐도 “너는 커서 사장을 해야 될 사람인데, 종업원들이 너처럼 일하지 않고 요령만 피우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하면서 더 혼을 내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고 부적응으로 미국 조기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곧바로 일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평범한 다른 친구들의 삶을 배우고 체화해 갔다. 내가 담임했던 아이들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내가 자취하던 반지하방에 놀러 와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자기가 먹어 본 음식 가운데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며 감탄하기도 하고, 반별 소풍으로 경춘선 통일호를 타고 갔다 오면서 지금까지 비행기는 많이 타 봤지만 기차는 처음 타 봤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겨울 방학 학급 여행을 떠나서는 계룡산 밑 꽁꽁 얼은 연못 위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 주워 아이스하키를 한 후 친구들과 목욕을 하면서 그 때가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가난한 친구들과 평생의 우정을 키워 가기도 했다.
부와 권력을 세습할 2세 아이들
지금 한국 사회는 가파르게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부와 권력의 세습도 여러 통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돈과 권력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어려움을 전혀 모르고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가지고 마음껏 소비만 하고 살 수가 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고급 사교육, 혹은 외국 교육을 받아 안정적인 전문직에 진출할 수가 있고, 부모가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고속 승진과 경영권 승계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진정한 행복한 삶인가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최소한 물질적인 면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완전히 별세계에서 사는 것이 아닌 한 이들이 가진 물질과 권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사 결정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좌지우지할 수가 있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도 피눈물을 흐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좀 더 훈훈한 방향으로 갈 것인지 더 팍팍하게 갈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경험할 기회를 주라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고민, 아픔, 눈물을 접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면서 평범한 사람들과 뒤섞일 수 있는 시간은 학교와 교회, 군대인데, 군대는 다양한 형태로 면제를 받는 경우가 많고, 교회도 부유한 사람들이 몰리는 교회에 출석할 경우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학교도 초등학교의 경우 사립 초등학교, 그 중에서도 귀족 학교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아 역시 그들끼리 어울리게 된다. 대학의 경우도 요즘에는 한 끼에 3,000원 하는 학생 식당뿐 아니라 한 끼에 2만 원 내지 3만 원 하는 고급 민자 식당들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대학을 다녀도 등록금 걱정 때문에 휴학을 하고 신용 불량자가 되는 친구들의 고민을 공감할 시간을 갖지 않고 별세계 생활을 할 수가 있다.
그나마 재벌, 갑부 혹은 권력층의 자녀들이 가난하고 평범한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활과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은 평준화 체제에 있는 중고생 시기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이들이 이 시기에 외국의 귀족 형 사립 학교로 조기 유학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최근 평준화 체제가 거의 무너져 가면서 고등학교는 이러한 가능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유일하게 중학교만 이러한 교육적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양산하는 사회로 가서는 안 된다
점점 더 심해지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부와 권력의 세습 문제는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다. 더구나 이 흐름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초, 중, 고 시기에 아이들이 부모가 가진 부와 권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서로 어울려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육 체제의 제일 중요한 요소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야 부모의 부와 권력 덕분에 다시 우리 사회의 최고위층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더라도 가난하고 평범한 친구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고려하는 행동과 결정들을 해 나갈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이 부분에 대한 주의를 놓쳐 버렸을 경우 빵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했던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사람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아니, 벌써 우리 사회는 직원을 야구 방망이로 구타한 후 한 대 당 얼마 돈을 던지고 가는 재벌 2세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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