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의 빈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여름 방학 기간에 15명가량 되는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이 한 청소년 선교 단체가 주관하는 수련회에 다녀왔다. 이 수련회는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요즘 아이들의 특성이나 코드에 잘 맞춘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000명의 청소년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찬양과 말씀,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수련회 프로그램의 전부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문화 행사나 체험 활동, 개인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일대일로 아이의 영혼을 만져 주는 시간은 전혀 없었다. 물론 찬양 사역자나 특강 강사들이 이름난 분들이긴 했지만 요즘 아이들의 코드에 맞는 강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풍성한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많이 변화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런 반응은 우리 교회 아이들뿐 아니라 거기 참석한 대다수의 아이들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이 단체는 매 여름과 겨울 방학 기간 동안 2,000명 단위의 수련회를 8회나 개최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격년 여름마다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고 개최하는 경험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강력한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수련회를 준비하기 위해 이 단체의 스태프와 자원봉사자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간구를 드렸고, 또 얼마나 격심한 영적 싸움을 싸웠을지 눈에 보는 듯했다.
조금 더 나아갔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물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찬양과 강력한 말씀, 깊은 기도의 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깊은 죄를 회개하고 자기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들을 해 나갔지만 이러한 회개와 헌신이 지나치게 개인 중심적이고, 약간 기복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이왕 아이들을 회개와 헌신으로 몰아갔다면 이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창조 세계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그 창조 영역 가운데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영성, 하나님과의 관계나 이웃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시대와 역사의 부르심에서 반응하고 회심하는 것의 의미, 자책과 반성,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훈련의 생활뿐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을 누리고 기뻐하며 자유하게 하는 영의 세계까지 나아갔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련회를 주관하신 분들이 복음의 다양하고 풍성한 측면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이러한 내용들을 수련회에 담고자 하는 욕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함을 다 담았을진대 과연 이 수련회에서 영적 둔감함과 세상의 현란함, 공부의 가중한 압박과 물질주의 가치관에 찌든 아이들 가운데서 이 정도의 회개와 헌신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할 때 자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단체에서도 이러한 아이들의 상황을 생각할 때 보다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복음의 핵심으로 초점을 맞추고 좁혀서 어찌하든지 그 좁은 영역에서나마 불이 붓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율법주의적 신앙 교육의 이면
나는 예장 고신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자랐다. 지금은 이 교단도 그 특성을 많이 잃었지만(사실 지금 한국의 대다수의 교회들이 신학적 특성을 거의 잃어버렸다.) 당시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주일 성수 등 몇 가지 요소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특성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주일에는 절대 공부를 하거나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교회 일이 주의 일이고 나머지는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 일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등이 내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시 내가 배웠던 신앙 세계는 지극히 좁고 단순하며, 이원론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신앙을 이렇게 좁게 해석했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순수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지켜 내는 뚝심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당시 이러한 율법주적인 배경 하에서 자란 선후배들 가운데 현재 한국 교회를 움직이는 믿음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물론 이들이 어릴 때 배운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틀을 그대로 고수했다면 좁고 완고한 신앙에 머물렀겠지만 이후 율법주의적인 틀은 깨뜨리고 폭을 넓혀가지만 그 율법주의적인 틀이 가지고 있던 철두철미한 신앙의 정신은 고수했기에 여러 교단과 각 전문 영역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렇지만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신앙 교육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가 있다고 해서 오늘날도 이러한 신앙 교육의 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때는 그것밖에 몰랐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충분히 아시기에 이를 선한 신앙 교육의 기초로 활용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의 보다 온전한 의미에 대한 해석이 많이 드러났고, 역사적인 신학의 깊이도 많이 알려진 지금은 할 수 있다면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교육하기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렇게 우리가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의 내용을 가르친다고 해서 아이들이 이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의 세계로 끌려 들어와 여기에 침잠하며 자기를 드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에 들어와 하나님 나라와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 복음의 총체성과 기독교 세계관을 배울 때 율법주의적인 배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들이 기존에 믿음의 전부라고 붙들고 있던 틀을 고통스럽게 깨뜨리면서도 자기 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열정과 복음의 깊이와 풍성함을 자기 안에서 소화해 가며 자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서울 지역 교회의 중고등부에서 이미 이런 내용들을 배우며 자랐지만 자기 내면으로부터 주와 복음을 향한 강한 열망이 없던 친구들의 경우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별 새로울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히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고 7일 모든 시간이 다 거룩한 날이고, 우리는 이 모든 시간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 소득의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만이 복음 전도의 전부가 아니고, 내 모든 삶을 통해 복음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 개념의 주일 성수나 십일조, 전도 생활의 개념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틀을 벗어나 성경에서 말하는 보다 온전한 물질과 시간,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종교적인 영성을 넘어 생활 영성으로, 경건을 넘어 창조의 세계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연약하고 우리 자녀들은 훨씬 더 연약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7일 모든 시간을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고, 모든 재물을 주를 위해 사용하고,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주일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십분의 일조차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입술의 전도에 드리는 헌신과 용기를 전혀 실천하지 못할 수가 많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내가 가르치는 그 가르침이 아니라 나의 이 삶을 보고 있을 수가 있다.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음의 온전함과 균형 감각, 풍성함과 넓이가 나도 모르게 세상을 향유하고, 타협하며, 십자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는 삶으로 변질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복음을 위해 나의 소유를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과 영원히 거할 날을 사모하며,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복음의 정신이 사라지고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이 신앙의 정신이 전수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혹 우리가 여러 풍성함 가운데서 정신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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