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손봉호, 그 이후
“선생님, 저희 출판사에서 펴내는 출판 소식지가 있는데, 여기에 손봉호 교수님의 신간 『잠깐 쉬었다가』에 대한 서평을 써 주시겠어요?”
제자가 스승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쓴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지만, 그 책의 부제가 “따뜻한 남자 손봉호 교수의 훈훈한 잔소리”였고, 책머리 제목이 “알고 보면 나도 따뜻한 남자”였던 것이 기억나 내가 알고 있는 스승 손봉호의 인간적인 면을 함께 소개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응하기로 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무식할 권리는 없다
내가 손봉호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1984년 대학 1학년 때였다. 마침 그해 손 교수님도 서울대로 옮기셨기 때문에, 손 교수님과 나는 입교(入校) 동기인 셈이다. 손 교수님은 부임 첫해부터 내가 소속해 활동하던 SFC라는 선교 단체의 지도 교수를 맡으셨기 때문에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손 교수님을 아주 가까이서 뵙고 교제하며 배우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동아리 지도 교수로서 한 학기 한두 번 그리고 수련회 등 요청할 때마다 그가 해 주셨던 강의는 지금도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날 정도로 내 속에 남아 있고, 그만큼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학 1학년 3월, 동아리 개강 예배 때 했던 첫 강의는 내 대학 생활의 기본 지침이 되었다. 그는 한국 교회의 반지성적인 풍토를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기독 대학생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이 세상과 학문의 흐름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때 그가 했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무식할 권리는 없다”는 말은 가슴 깊이 박혔다. 이뿐 아니라 기독인은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즉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외 세상의 모든 이론을 상대화할 수 있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대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학점과 출세만 바라보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은 태도지만, 사회를 변혁하고 민중을 위해 살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절대화하고 독선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음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이렇게 때를 따라 지성과 영성을 깨우는 좋은 강의를 해 주셨지만, 지도 교수로서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련회 때마다 마치 돈을 맡겨 놓은 듯 찬조금을 요청하는 우리의 손길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연구실을 우리의 모임방으로 내주셔서 그의 연구실은 저녁 시간만 되면 우리 동아리의 아지트로 돌변했다. 가끔 연구실에서 일을 보시다가 우리가 쳐들어가면 미안한 듯 서둘러 방을 비워 주시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한 학기에 한 번 정도는 1학년 신입생들을 불러 설렁탕을 사 주시면서, 열심히 전도해서 다음 학기에는 지금보다 두 배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더 맛있는 것을 사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곤 했다.
그가 화를 낼 때
그는 학부 과정에 ‘사회와 철학’과 ‘사회윤리’라는 두 과목을 개설했는데, 나는 두 강의를 다 신청해서 들었다. 그는 정해진 강의 시간을 1분도 빼먹는 일이 없었고, 당연히 휴강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강좌당 철학 고전 10권 이상의 서평을 요구하는 등 과제가 많은데다가 학점이 짜기로 유명했다. 그가 단회적으로 종교학과에서 개설한 ‘기독교 개론’ 강좌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각 선교 단체 리더들은 물론이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때 교수님은 보고서나 시험에 임하기 전 학문적으로 임하지 않고 신앙 고백적인 글을 적는 사람은 제일 낮은 점수를 주겠다고 경고를 해서 경건파 학생들이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손 교수님의 강의는 전체적인 철학과 사회사상의 흐름을 완전히 꿰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명료하고 쉬운 언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금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과의 접촉점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개인 윤리와는 구분되는 사회 윤리의 영역, 개인의 도덕성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 구조 문제의 본질과 그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론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나 신(新)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해방 신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남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깊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군부 독재 상황의 불의에 대한 분노를 누구보다 깊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서 사회 구조의 문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 그 가운데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셨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캠퍼스의 분위기 가운데서 개인 윤리를 강조한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비겁쟁이라는 욕을 먹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학생들 가운데는 손 교수님에게 위선자라는 비난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교수님은 그 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며 “허! 내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라고 웃곤 하셨다.
이러한 그가 강의 시간에 딱 한 번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시 민중 혁명을 강조하던 캠퍼스 분위기 가운데서 한 학생이 농민과 노동자의 민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장애인을 폄훼하는 말을 했을 때 교수님이 정색을 하며 그 학생을 꾸짖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계급으로서 농민과 노동자의 민중적 성격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있어서는 농민과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장애인을 포함한 소외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친구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대, 우리의 숙제
손 교수님은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하면서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보다 10년 전인 1976년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한 이래 거의 매주 설교자로 봉사하고 있었고, 장애인 선교 단체인 밀알선교회도 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시작이 우리 사회의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흐름과 맞물리면서 그는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설교와 시민운동 외에도 사회 각 분야의 변혁을 위해 뜻을 가지고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단체의 공신력을 얻기 위해 손 교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사회적 갈등을 공정하게 다루어야 하는 정부의 여러 위원회에서도 손 교수님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사회의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언론들도 제일 먼저 손 교수님에게 인터뷰나 기고를 요청했다.
이러한 상황이 나를 포함한 손 교수님을 잘 아는 제자들에게는 약간의 불만 상황이기도 했다. 그것은 손 교수님과 같은 지적 역량과 시대적 혜안을 가진 분이 사회의 여러 빈 부분들을 채우는 역할보다는 우리 시대의 본질을 밝히고 기독교적 지성의 빛을 비추는 연구 성과를 내는 일에 집중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 교수님이 대학 교수직을 은퇴를 할 즈음에는 연구소를 설립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책을 써 주실 것을 직간접으로 이야기를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고민을 손 교수님이 스스로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가 고(故) 윤종하 장로님(한국 성서유니온 초대 총무)의 장례식에서 “저는 단호하지가 못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제게 주어진 일을 하고 살았지만, 윤 선배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윤 선배님이 부럽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은 이런 고민의 한 흔적이리라.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학자들의 테두리 속에 갇힌 언어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깨우쳐 주고 영향을 미치며 고통을 덜어 주는 보다 대중적인 사역, 보다 직접적으로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고쳐 나가는 사역에 더 큰 의미를 두셨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제자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작업은 그것을 요구했던 바로 그 사람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스승을 두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큰 숙제를 떠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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