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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반성은 나의 힘(2013.08)

좋은교사 2014. 6. 5. 10:57

정병오 칼럼

반성은 나의 힘

 

 

지난 628일부터 74일까지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이 주관하는 독일통일연구여행에 연구위원 자격으로 함께 다녀왔다. 연구 여행 기간 동안 동독과 동유럽 체제전환 과정과 사회 발전 연구 결과의 현장 적용을 위한 전이 프로젝트연구 내용 중 일부 내용에 대한 집중 세미나에 참여하고, 베를린에 남아 있는 나치 시대의 역사 기록물들과 분단의 흔적, 유물들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독일은 2000년부터 2012년까지 13년간 구 동독 지역의 할레대학과 예나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체제 붕괴 후의 사회 발전이라는 매우 거대하고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었다. 이 연구에는 30여 명의 교수들이 투입되어 동독과 동유럽의 체제 붕괴 이후 사회 전 분야에 있어서 어떤 문제에 부딪혔고 그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해결했으며 그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가에 대해 매우 실증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리고 또 다른 분단국인 한국 사회의 통일 준비 과정에 그 결과를 적용할 방안을 모색하는 3년짜리 추가 연구가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2013년부터 진행 중에 있었다.

정치적인 통일은 1990년 동독 지역의 5개 주가 독일 연방에 가입하기로 결정함을 통해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동독 출신이나 서독 출신 할 것 없이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으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의 통일은 정치적 통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 중인 과정이다. 지난 13년간 진행했던 사회주의 체제 붕괴 후의 사회 발전프로젝트 역시 사람의 통일이라는 긴 과정에 대한 학문적인 기록이면서 나침반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작업의 결과를 자신의 나라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분단의 과정에 있는 한국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주기 위해 후속 연구에도 국가적 재정을 투여하는 모습 역시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의 통일과 통합, 어떻게 가능했나?

이번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한 교수들이 강조한 것은 독일의 통일이 동독의 몰락이나 서독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동독이 공산주의를 포기한 것은 맞지만 이는 동독 정부의 개혁 과정과 동독 주민들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남한이 통일을 생각할 때 마치 북한 땅에 사는 사람들을 다 몰아내고 땅만 차지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현했다. 그러면서 통일의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 주민들이 통일이 되어도 자신들의 존엄성과 인권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래야 북한 주민 스스로가 통일의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독은 분단 직후 극심한 냉전의 상황으로 인해 정부간 관계가 긴장으로 치닫는 상황 가운데서도, 서독 교회를 통한 동독에 대한 지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동독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서독연방정부가 비밀 자금을 서독 교회에 지원하고,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를 통해 동독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연결고리를 이어갔다. 그 결과 동독 교회는 반체제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동독의 민주화와 통일의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통일의 과정에서도 서독은 인권과 법치주의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통일 전 동독 주민들의 행위에 대해 그 당시 동독법의 기준에 위배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통일 후 서독의 기준으로 소급 적용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독법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위법인 강간, 사적 폭력 등에 대해서는 처벌을 했지만 공산주의 통치에 참여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렇게 함을 통해 통일 후에도 공산주의 핵심 통치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동독 엘리트들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통일의 방식도 동독의 5개 주가 독일의 연방에 가입하는 방식을 취함으로 동독 주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 뿐 아니라, 정치적 역할 관계도 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의 대결 방식이 아닌 동서독의 여러 주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놓고 대립과 협력을 하는 구도를 통해 여러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독일의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의 사회 통합 과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인권과 행복 추구, 지방분권과 자치, 평등과 연대성 등 민주주의를 지키고 적용하고자 했던 과정의 부산물에 가까워 보였다.

 

독일의 힘은 어디서 나왔나?

하지만 과연 독일이 언제부터 이러한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던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유럽의 역사에서 볼 때 민주주의 혁명을 겪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후발 주자였다. 더구나 독일은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였다. 거기다가 나치 시절 600만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한 엄청난 반인권적인 범죄를 자행한 나라였다. 그렇지만 역으로 나치 히틀러를 지지해서 홀로코스트 만행을 저지르고 전 세계를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경험은 다시는 이러한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겠다는 반성으로 이어졌다.

우리 연구 여행팀이 집중 세미나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 동안 한 일은 독일이 이러한 반성의 기록으로 남긴 역사적 기록을 방문하고 확인하는 일이었다. 독일의 현대사를 집대성 해놓은 독일 역사박물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을 기록하고 추도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 예수님 이후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삶과 역사, 히틀러에 의한 대학살을 포함한 차별과 핍박의 전 과정을 집대성한 유대인 박물관’, 나치 히틀러의 집권과 광기, 침략의 과정, 게슈타포 비밀경찰, 히틀러의 친위대였던 SS의 활동을 포함한 모든 자료를 전시한 테러의 포토그래피 박물관’, 베를린 장벽이 가장 길게 남아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베를린 장벽의 역사와 장벽을 넘어 자유를 찾아왔던 흔적들을 남긴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동독 주민들의 삶을 기록한 동독박물관’, 동독의 악명 높았던 비밀경찰인 슈타지에 대한 기록과 흔적이 담긴 슈타지 박물관’, 그리고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포츠담회담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체칠리엔 호프 궁전등을 방문했다.

이렇게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 중심부에 수많은 역사의 기록물들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역사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상세하고도 반복적으로 기록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의 흔적들을 통해 자신들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에게 선배들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진정성을 보일 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가자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었고 또 반복해서 하고 있기에 전후 독일의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통일 이후의 빠른 국민 통합이 가능했고, 나아가 유럽 통합의 중심 역할과,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와는 또 다른 방향의 길을 제시하는 나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같은 2차세계대전 전범이고 이후 같이 경제 부흥을 이루었지만 이웃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일본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리 사회는 과연 우리의 잘못된 역사에 대해 얼마나 기록과 반성을 하고 교육을 시키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과연 피해자로서만 존재했고 가해자가 된 적이 없었는가? 우리는 어두웠던 독재의 역사 가운데 자행되었던 인권 침해와 국가 범죄를 얼마나 기록하고 있으며 희생자들에 대해 제대로 추모하고 있는가?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가운데서 남과 북이 저지른 잘못을 서로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북한은 북한의 잘못을 참회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반성하며 교육할 수는 없는 것인가? 멀지만 결국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딘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보고, 감당해야 할 숙제를 안고 온 귀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