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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일기

2011년 〈데몰리션 맨〉 시즌 2



권미진의 알사탕 7
2011년 〈데몰리션 맨〉 시즌 2


 실베스터 스탤론이 출연해 미래 사회의 정의 수호를 외치는 〈데몰리션 맨〉이라는 영화가 있다. 인물들이 적당히 뛰고, 때로는 잡고, 때로는 도망가다가 적절한 때에 사건이 마무리된다는 내용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다 그렇듯이, 액션 신이 끝나자마자 집중력이 무참히 떨어지기에 채널을 돌려 버렸다. 뭐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경찰 스파르탄(실베스터 스탤론)은 사건 해결의 장애물을 거침없이 없애 버려 데몰리션 맨(파괴자)이라는 별명을 갖는다. 어느 날 피닉스라는 킬러가 빌딩 안에 폭탄을 설치하고 30명을 인질로 붙잡는 사태가 벌어진다. 스파르탄은 킬러 피닉스를 체포하지만, 빌딩은 폭파되고 30명의 생명을 잃게 된다. 그래서 업무상 과실 치사 협의로 스파르탄은 70년 형을 받고 냉동 감옥에 수감된다. 2032년 킬러 피닉스의 탈출로 도시는 파괴되기 시작하고 스파르탄은 피닉스를 잡기 위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한편 냉동 상태에서 재생되는 동안 스파르탄과 피닉스는 ‘새로운 교육’을 받았는데 피닉스는 과거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변해 있었다.


새로운 교육

 저 ‘새로운 교육’의 실체를 알고 나는 교무실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주입된 새로운 교육은 바로 뜨개질이었다. 실베스터의 입장에서도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근육질 몸이 섬세하게 뜨개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참 웃긴 일이기도 하고, 영문도 모르고 뜨개질할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주입식 교육에 어찌나 잘 길들여져 있는지 수업을 하다 보면 배를 잡고 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음은 본성을 억누르고 교육 현장에서 주입되고 있는 2011년 한국형 데몰리션 맨들이다.


관용 표현 익히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끊임없이 물을 요구함. 더워 죽겠다며 창문 열어 달라고 아우성을 침. 조용하라고 몇 번 소리 지른 뒤에야 입을 다물고 있기는 함.

 국어 선생님 : ‘누워서 침 뱉기’의 뜻이 뭘까요?

 일  동 : (와글와글)

 국어 선생님 : 뭐냐니까 !

 학생 1 : ‘남을 해치려다 도리어 자신이 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국어 선생님 : 그런데 왜 누워서 침을 뱉는다고 표현했을까요?

 학생 1: 그러게 말입니다.

 학생 2: 학원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주제 토의 수업

 얼굴은 상기되어 있으나 예의상 앉아는 있음. 대강의 호기심을 갖추고 있음.

 국어 선생님 : 부모님을 부양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일  동 : (본능적으로) 돈요 !

 국어 선생님 :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학생 1: 집에서 그렇게 들었어요 !

 학생 2: 저희 집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

 학생 3: 어? 이거 시험에 나와요? 별표 할까요?


교직원 회의

 부장 선생님 : … 이러한 목적으로 교원 연수를 하고자 합니다. 선생님들, 많이 협조해 주세요.

 평교사 1 : 이거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원 평가에 반영합니까?

 부장 선생님 : 학교 평가와 성과급 기준에 반영됩니다.

 평교사들 : (묵묵부답)

 부장 선생님 :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주입된 진리, 주입된 사랑

 감동과 재미가 있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따야 하기 때문에 듣는 수업. 언제부터 아이들이 생존의 원리를 터득한 것일까. 아마도 가정과 사회에서 점수가 능력으로 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원리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지식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배우는 태도도 주입된 우리의 교실.

 어느 날 수업을 하다가 내가 하고 있는 말들과 이 내용들이 무엇인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수업 내용을 꽤나 잘 전달하고 있고 재밌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곱씹어서 깨달은 내용이나 고백적인 인생이 없었다. 나의 애처로운 경험들, 주변의 무용담들을 적절히 예로 들어서 내가 가진 이념과 환경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주입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로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뜨개질 기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정도, 진리도, 지식도 모두 주입된 기술.

 그렇다면 나에게, 우리에게 주입된 것은 또한 무엇일까. 또한 그 주입된 현실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장구한 세월 속에서도 신앙의 선조들이, 또 교육의 선구자들이 잃어버리지 않고 추구했던 아름다운 가치들이 있을 텐데….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서 함께 나누어야 할지 많이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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