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의 춘향골 아이들 16
보고 싶을 뿐이야
조 혜 정
가슴에 대어 보는 ‘색종이 편지’
초임지에서 고단한 업무와 불규칙한 식사, 노후한 관사 생활 등으로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렸다. 급작스럽게 오게 된 현재 우리 학교에서도 어려움은 여전히 따랐다. 큰 학교임에도 내게 배정된 업무 부담이 크고, 무엇보다 여러 가지 이름의 회의가 많아 늘 책상맡에 일들은 산적했다. 그 속에서도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늘 가쁜 숨으로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른 아침이면 더 힘찬 목소리로 아이들을 부르며 인사하고 싶었지만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한 상태로 교실 문을 열 때도 있었다. 이런 나인데도 나와 눈을 맞춘 민화는 살며시 가까이 다가와 두 손을 배꼽에 댄 채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도아는 ‘빨강머리 앤’의 단짝 친구 ‘다이애나’처럼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말면 참말로 귀여웠다. 새 학교에 적응 못해 힘들어 하던 내게,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듯 보조개를 보이며 하얀 박꽃처럼 웃어 주었다. 아이들과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종업식 날 아침. 도아는 여느 때처럼 살포시 꽃잎 피어나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두 손에 든 작은 상자와 함께 편지를 전해 준다.
언젠가 도아는 개나리 빛 색종이에 이런 쪽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도아예요. 선생님, 엄마가 선생님에게 편지 보내라고 했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안녕히 계세요.” 편지가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준다는 것을 믿고 글을 통해 아이들과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는 담임 교사를 향한 어머님의 따뜻한 동감(同感)이 전해져 왔다. 아이의 그 엉뚱한 편지를 볼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또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사실은 내일도 사랑할 거라고….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도아에요.
지금까지 가르쳐 주셔서 감사해요.
혼이 날 땐 선생님이 무섭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 덕뿐에 제 습관이 고쳐졌어요. 지금까지 가르쳐 주셔서 감사해요. 한 해 동안 선생님 덕뿐에 똑똑하게 되었어요. 선생님 덕분에 활기찬 한 해를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럼으로 선물을 준비했어요. 선물은 팬티에요. 그럼 줄이갰습니다.
2010년 2월 9일 선생님의 재자 도아 올림
비타민 먹고 남자 친구 생기세요
“선생님, 여기요.”
속눈썹이 길고 눈빛이 깊은 찬영이는 또다시 두 눈 가득 별을 담은 채 해맑게 웃으며 색종이에 싸여진 작은 상자를 내민다. 상자 윗부분에 앙증맞게 붙여진 분홍색 쪽지를 열어 보니 하트 모양이다. 그 어여쁜 편지지 모양에 짧게 소리치며 이제 막 아홉 살 아이처럼 좋아하는 나를 아이는 잠시 유심히 바라보며 내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양면 색종이에 쓰인 이 사랑스러운 편지를 나는 연신 미소 지으며 읽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찰랑찰랑 물이 차오른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감사해 가만 편지를 가슴에 댄다.
‘어찌 이것이 네 말처럼 ‘작은 것’일 수 있겠니? 넌 선생님이 아프면 슬프다고 말해 주는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데…. 그리고 어찌, 어찌 잊을 수 있겠니? 마지막 인사에서도 사랑스런 손목 들어 선생님에게 파이팅을 외쳐 주는 널, 너를….’
조혜정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찬영이에요. 1년 동안 저희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 안 들을 때도 있었는데 죄송했어요. 선생님 그리고 제가 용돈을 모아서 비타민을 샀어요. 작은 거라도 기쁘게 받아주세요. 그리고 비타민 먹고 얼굴도 예뻐지시고 남자 친구도 생기새요. 항상 겅강하시고 아프지 마세요. 제가 슬프니까요. 저 잊지 마세요. 선생님 사랑해요. 파이팅!!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서야 나는 아이들에게 답장을 해 주었다.
오늘처럼 촉촉이 내리는 이슬비에 더 선명해지는 푸른 풀잎과 같이, 맑고 밝은 도아야 ! 선생님이 힘들고 피곤할 때에도 힘을 주던 네 예쁜 웃음이 떠오르는구나. 작년을 마무리하며 도아가 선생님에게 준 꽃 팬티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잘 입고 있단다. 사랑 가득 담은 네 편지는 읽고 또 읽어도 행복해. 고마워, 도아야. 선생님도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우리 도아 예쁘게 머리 빗으라고 ‘분홍 머리빗’을 선물한다. 언제나 건강하고 활기차며 하나님 사랑 안에 네 꿈을 꼭 이루길 선생님이 기도한다. 사랑해 ! 도아야. ♡
도아를 축복하는 조혜정 선생님
생각만 해도 금세 피로가 달아나고, 우울했던 마음까지도 금방 씻겨 나가 버리는…. 그만큼 선생님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는 우리 귀한 제자, 찬영아!
우리 찬영이의 편지를 받아 읽을 때마다 선생님은 어떤 동화책을 읽을 때보다 놀라고 감동을 받는단다. 선생님을 생각해 주는 네 따뜻한 마음이 참 고맙구나. 지난 1학년 7반 마지막 날, 네가 ‘레모나’를 색지로 싸서 주며 편지에 “선생님, 비타민 먹고 예뻐져서 얼른 남자친구도 생기세요” 하고 써 주었을 때, 선생님과 선생님의 엄마는 정말 깜짝 놀라며 함박 웃었단다 ! 참으로 깜찍하고 소중한 우리 찬영이, 여름 방학도 잘 보내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길 선생님이 기도할게. 사랑해 ! ♡ 찬영아. ♡
조혜정 선생님
찬영이는 1학년 겨울 방학 때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다. “… 선생님은 뭐 하고 지내셨어요? 선생님 보고 싶어요. 그리고 선생님 심심하시죠. 저도 하늘만큼 땅만큼 심심해요. 나는 친구들을 빨리 보고 싶어요. 선생님, 선생님 사랑해요. ♡♡♡”
찬영아 ! 선생님도 보고 싶단다. 선생님도 네가, 너희들이 보고 싶단다. 너희들과 한 해를 같은 교실에서 지내고 지금은 각자 다른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언제까지나 선생님 가슴속에서 꿈꾸고 울며 웃고 있단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전북대 교정을 걷다 내 키만큼 자란 철쭉에 눈 맞춤한다. 우리 반 아이들 예쁜 속눈썹 같은 철쭉 수술을 바라보며 약속한다. 선생님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고 또 좋다고 말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너희들을 보고 싶어 하며 살 거야. 언제까지나. 지금도 선생님은 그대가 ‘보고 싶을 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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