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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교단 일기

전 찌질이가 될 거예요 ㅜ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6. 7. 09:22

 아줌마 쌤의 계속되는 교사도전기 14
전 찌질이가 될 거예요 ㅜㅜ

김 은 영

“전 찌질이가 될 거예요.”

 사람들은 제게 물어요.

 “너 꿈은 대체 뭐냐?”

 특히 엄마와 누나와 선생님은 말끝마다 이 말을 달고 사세요. 어제도 선생님은 제게 물었어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전 대답했죠.

 “그냥 찌질이로 살 거예요. 공부 안 할 거예요.”


저는

 올해 열여섯 살입니다. 제가 제일 행복할 때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냉장고를 열어 혼자 마음껏 먹을 때입니다. 엄마는 제가 자꾸 살이 찐다고 걱정하시지만 먹는 시간이 제일 즐거운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반에서 제가 제일 뚱뚱해서 조금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뚱뚱해서 그런지 별로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친구들과도 잘 지냅니다. 아이들은 제가 게임을 잘하는 것을 은근 부러워합니다. 얼마 전에는 PC 방에서 하는 게임 대회에 나가 2등 상도 탔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제가 게임 중독이라도 걸린 것처럼 여기지만 인터넷 중독 검사에서 정상으로 나왔으니 저는 걱정 안 합니다.

 저는 학교 다니는 게 즐겁습니다. 3년 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노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점심도 맛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영어, 수학 수준별 수업에서 늘 하반이고, 7교시 방과 후에는 늘 미달이 반으로 갑니다. 1학년 때부터 공부 잘하는 친구가 제 멘토가 되어서 공부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종례 후에 남아서 공부한 것을 확인받고 갑니다. 또 1년에 한두 달은 8교시에도 남아 수업을 듣습니다. 제가 미달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친구들하고 선생님이 무료로 도와주는 겁니다. 잘 외우지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나 때문에 남아서 도와준다고 하니까 그냥 자리는 잘 지킵니다.


제가 운 이유

 그런데 요즘 마음이 이상합니다. 7교시에 몇 명의 아이들 때문에 선생님들이 내는 짜증과 잔소리가 듣기 싫어졌습니다. 함부로 구는 아이들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듣기가 싫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매일 꾹 참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선생님과 아이들이 우리를 ‘찌질이’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 못하면 다 찌질이로 보나 봅니다.

 제 멘토는 우리 반 남자 아이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자꾸 제게 쓰라고 하고 외우라고 합니다. 공부 못하는 저를 답답하게 여깁니다. 사실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데 답답한 저 때문에 종례 후까지 남아 있으려니 제가 밉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날도 저는 대충 확인받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선생님은 저에게 더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돌아간 뒤 제게 물었습니다.

 “게임할 때가 제일 행복해? 그것만 하고도 괜찮겠어? 진짜 아무 생각이 없어?”

 그 소리를 듣고 저는 순간 “그냥 찌질이로 살 거예요”라는 말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선생님의 말씀은 저도 다 알고 있는 거였습니다. 프로 게임가가 되든 평범한 회사원이 되든 기본은 해야 한다는 것. 늘 엄마가 말씀하신 것이고, 저도 기본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학교도 잘 나오는 거고요. 그런데 제 입에서 ‘찌질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정말 제가 찌질이가 된 것 같아 울컥했습니다. 그동안 ‘공부 못하는 아이’로 살아 온 시간이 생각나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담임 교사의 덧붙임

 겉보기와 달리 순하고 착하다는 이야기를 전 담임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수업 시간에는 무뚝뚝하니 표정 없이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느리게 움직였다. 뚱뚱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몸이 둔해 보이는 녀석인데 가정 방문을 통해 어머님이 녀석을 심히 안타까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첫 마디가 “우리 아이는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께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였다. 공부를 못하니 선생님께 면목이 없다는 말 속에서 나는 성적 낮은 자의 서러움과 상처를 봐야 했다. 학교가, 그리고 이 사회가 성적이 낮은 사람을 게으르고, 생각이 없고, 꿈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여 왔다는 사실에 새삼 부끄러웠다. 사실 나도 학창 시절 공부를 못하는 축이었고, 현재 우리 집 아이들도 공부를 못한다. 현 학교 교육에서는 공부 못하는 아이의 자리에 누군가가 반드시 있게 마련 아닌가. 

 녀석이 운 날은 국어 시간에 받아쓰기를 본 날이었다. 녀석의 점수는 하필 빵점. 받아쓰기를 보기 전, 빵점은 간식을 쏴야 한다는 약속을 정한 터라 우리는 유쾌하게 웃으며 녀석에게 사탕을 세 봉지 사 오라고 요구한 상태였다. 체육 시간 다쳐서 퉁퉁 부은 발과 울어서 새빨개진 눈을 하고 집으로 갔으니 사탕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겠다 싶어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1교시 국어 수업이 끝난 후 녀석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청포도 사탕 세 봉지를 교탁 위에 무심한 듯 올려놓는다. 뒤돌아 자리로 가는 녀석을 보며, 우리가 써 준 생일 롤링 페이퍼가 소중하게 끼워져 있던 녀석의 책상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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