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보다 선생님이 제일 중요합니다
김종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청소년폭력예방재단(www.jikim.net) 이사장. 삼성그룹 비서실과 삼성전자 홍콩지점장을 거쳐 신원그룹 기조실장 전무이사로 근무했다. 성공한 직장 생활과 행복한 가정생활 중 하나뿐인 아들이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1995년 다시는 이 땅에 자신과 같은 불행한 아버지가 없기를 소망하며 국내 최초의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NGO인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을 설립했다. 발로 뛰면서 학교폭력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교육, 시민운동, 장학사업, 출판 등 다양한 사업으로 사회적 약자인 청소년과 고통 받는 가정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청예단 5대 이사장과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 상임대표,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이사를 겸하고 있다.
인터뷰·김진우
청예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라 하면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최초이자 대표적인 단체라고 인정된다. 이 단체는 18년 전 아들을 잃은 슬픔을 사명감으로 승화시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선 한 아버지의 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UN의 공식적인 인증을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 또 그만큼 컸던 성취와 기쁨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나왔다. 제목은 <아버지의 이름으로>이다. 이 책은 현재 비소설 부분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영화로 제작중이라고 한다. ‘아버지’ 김종기 이사장을 만난 것은 5월 10일 ‘학교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하는 스승의 날 교사 기도회’를 준비하던 때였다.
18년 전의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저는 사업으로 바빠 외국으로 출장을 자주 나갔는데 그 날은 베이징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살아있는 대현이를 마지막으로 본 그때, 대현이의 표정은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녀석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길 바라며, 간단히 “힘내!” 한마디를 남긴 채 저는 차에 올라타고 서둘러 출장을 떠났습니다. 저는 6월 8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대현이는 그날 새벽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대현이가 그날 새벽 3시쯤 아파트 5층 자기 방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위로 떨어졌고 상처만 입었습니다. 대현이는 다시 올라가 몸을 던졌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베이징에서 새벽에 눈을 떴고 불현듯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내는 정적을 깨뜨리며 “대현이가 죽었어요”라고 했어요. 저는 벼락을 맞은 듯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며 쓰러졌습니다. 이를 악물고 업무를 정리하고 박성철 회장님께 보고했습니다. 성모병원에 도착해서 영안실 앞에 섰는데 하염없이 눈물만 났습니다. 아들은 화장을 했고 바다에 뿌렸습니다.
대현이는 어떤 아이였나요?
아이를 바라보는 아비의 눈이라는 게 공정할 수는 없겠지만 대현이는 제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과묵하면서도 품위가 있고 공부든 운동이든 못하는 것이 없었어요. 수학경시대회, 글짓기 대회 등에서 당연한 것처럼 1등상들을 받아 왔어요. 수영 대회에서도 학교 대표로 나가 상을 받기도 했고 농구도 곧잘 했어요. 요즘말로 하면 대현이는 ‘엄친아’였어요. 대현이의 인기는 아빠인 제가 봐도 부러울 정도였지요. 아내에게 전해 듣기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3학년 때는 팬클럽이 다섯 개였고, 그 당시에는 삐삐가 있었는데 대현이가 간 이후에도 1년 정도 메시지가 꾸준히 들어오곤 했어요. 거기에는 “대현아, 잘 가. 미안해. 널 사랑해….” 등 많은 메시지들이 끊임없이 들어왔어요.
아들이 괴롭힘을 당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대현이를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의 남자 친구가 질투가 나서 친구들과 더불어 대현이를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그 학생들은 대현이보다 위 학년이었고 패거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대현이를 수시로 불러내 때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장례를 마치고 대현이를 괴롭힌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모두 다섯 명이었어요. “도대체 왜 그랬느냐?” 묻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부덕하고 못난 아비의 책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대현이 누나로부터 가해 학생의 소식을 들었어요. 그 아이들이 다시 대현이의 친구 두 명을 불러 폭력을 휘둘렀다고 했어요. 심하게 맞아 한 명은 기절했고 다른 한 명은 팔이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튕겨 올랐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두 개의 생각으로 꽉 찼습니다.
다음 날 검찰청을 찾아 고향 선배였던 신승남 부장 검사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외아들을 폭력으로 잃었다. 용서하고자 했지만 가해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또 폭력을 휘둘렀다. 내 아들을 죽게 한 아이들을 반드시 처벌해 달라. 만약에 국가가 처벌하지 않으면 내가 개인적으로 응징하겠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들을 처단하고 한국을 떠나겠다.” 진심이었습니다.
검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피해 학생 어머니들이 2차 피해를 우려해 진술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다섯 학생은 아무런 조사나 제제도 받지 않고 그렇게 거침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대현이와 같은 비극은 되풀이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학교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학교폭력은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폭력은 교사와 부모, 학생이 모두 얽힌 지극히 구조적인 병폐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당시는 누구도 학교폭력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학교폭력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그 첫 단추는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아픈 상처를 헤집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결심을 도운 사람은 김준호 교수였습니다. 그 분은 “그런 일은 밝혀야 합니다. 피해를 당하고 가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이 나서야 합니다. 김 선생님이 시작하세요.” 하며 쥐고 있던 볼펜을 밥상에 내려쳐서 볼펜이 망가져 스프링이 튀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알려라”고 했고 기자회견을 했던 것입니다. 후폭풍이 몰려왔습니다. 공중파 방송과 일간지에서 특집으로 다루었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국회에서도 논의가 일어났고, 대통령도 나서서 학교폭력 근절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범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이 나왔습니다. 이어 YMCA를 통해 피해자 사례를 접수했고 수많은 전화가 쇄도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모임이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시민의 모임’입니다. 자원봉사자 다섯 명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 신원그룹 기조실장을 맡고 있었지만 회사 가까이 20평짜리 사무실을 얻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회사를 떠나 청예단에 헌신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한 그룹의 기조실장이라는 자리와 학교폭력과 싸우는 일은 병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것은 내가 20년 동안 몸 바쳤던 모든 것을 떠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 했으면 됐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현이를 생각할 때 ‘이 정도면’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시늉만 내는 것으로는 훗날 대현이를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박성철 회장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지금 회사가 몇 개인데 김 전무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가? 24시간을 다 써도 부족할 판에!”라고 하시며 “내일부터 사장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지가 될 텐가? 사흘 안에 택일하게!”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 야속함을 느꼈지만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결심을 말씀드리자 박 회장은 “이 사람, 고집이 참 세네” 하시며 작별 인사를 할 때 2천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며 “쓰소!” 간단히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회사 밖으로 나왔고 조직도 힘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저의 숙명이었습니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청예단을 오늘날까지 이끌고 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18년 전 청예단 설립은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식이었습니다. 학교폭력이라는 명칭 자체도 금기시되었습니다. 교육공무원들의 비협조가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법인 설립을 할 때 학교폭력이라는 명칭을 못 쓰고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라고 해야 했습니다. ‘부모가 잘못하니 아이가 자살하지’라는 말을 면전에서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학교폭력예방법 제정을 위하여 서울역 등에서 캠페인을 하며 47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청원하였고 결국 2004년에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UN 가입에 도전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뢰를 얻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2년 6개월 만에 불가능할 것 같던 그 일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청소년 단체로서는 유일한 경우입니다.
좋은 일도 있었지만 가슴 아픈 일도 많았습니다. 후원을 빙자하여 청예단의 명성을 이용하기만 한 사람도 있고, 제때 급여나 임차료를 지급하지 못한 어려움 등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고마운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윤도현 홍보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 드립니다.
교사가 움직여야 학교폭력이 해결됩니다. CCTV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단체가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다만 일회적으로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좋은교사운동이 학교폭력 문제가 바로 우리의 책임이라고 선언하고 발 벗고 나서는 용단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고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우리 교단과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가장 중요한 첩경임을 확신합니다.
18년 동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왔지만 여전히 학교폭력으로 인한 슬픔의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아직도 달려갈 길이 멀다는 신호일 것이다. 지나온 성취를 돌아보기에는 아직도 남은 길이 너무 멀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길은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시작한 길들이 만나고 엮어지고 또 분화되면서 평화의 땅을 향해 이어질 것이다. 이 큰 흐름 속에서 좋은교사운동도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교사들이 서 있는 곳은 전쟁으로 말하자면 최전선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치열하고 부상도 많다. 그러나 앞서 수고한 여러 손길들과 우리와 뒤에 함께 하는 원군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다시 한 번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지금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외치는 “선생님, 도와주세요!”라는 절박한 소리에 “내가 함께 있을게”라고 반응하는 교사들로 인해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진 학교 현장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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