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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갈라디아서 50번 읽기(2017.08)

정병오 칼

 

갈라디아서 50번 읽기

 

 

갈라디아서 50번 읽기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김기현 목사님(부산 로고스교회)이 올린 이 제목에 내 눈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보니 갈라디아서를 7, 8월 두 달 동안 하루에 한 번 꼴로 읽어서 총 50번 이상을 읽자고 교인들에게 제안한 내용이었다. 왜 하필이면 갈라디아서일까? 목사님이 특별한 설명을 해놓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매일성경QT 7월 본문이 두 주 정도 갈라디아서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빌립보서 반복 읽기의 추억

30년 전 군 복무를 할 때가 생각났다. 훈련병에서 이등병으로 이어지면서 고된 훈련과 폭압적인 내무반 생활이 계속되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숨통은 매일 밤 2시간씩 서는 경계 근무 시간에 밤하늘 별을 보며 기도했던 시간과 틈틈이 포켓용 성경을 읽는 시간이었다. 내 속의 아픔과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마음껏 아뢸 수 있었던 기도 시간과 달리, 성경 읽기는 본문에 따라서 내 삶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답답함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본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 때 택한 성경이 빌립보서였다. 당시 짧은 내 성경 지식에 따르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고, 내 삶은 기쁨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다.

빌립보서 읽기가 몇 회까지 지속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최소한 50회 이상, 아니 100회 이상 읽지 않았나 생각한다. 빌립보서를 거의 외울 정도로 읽으면서 내 속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기쁨이란 단어에 감격이 되어 기뻐할 수 없는 내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며 현실을 이겨나갔다. 계속 본문을 읽으면서 빌립보서가 구원받은 성도 가운데 일어나는 자아와의 싸움, 자기부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기쁨은 그 결과 중 하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러면서 군 생활은 물론이고 이전에 내가 지내왔던 삶과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자아와의 싸움, 자기부정이란 관점에서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 성경공부 교재

빌립보서 반복 읽기가 내게 준 유익은 성경의 한 권을 통째로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한 권 전체의 문맥을 꿰뚫고 분석하는 힘을 길렀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성경을 읽을 때 두려움이 사라졌다. 어떤 본문이든 반복해서 읽다보면 기본적인 흐름이나 메시지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물론 본문에 명백히 나타나있지 않은 배경이나 관용적인 표현은 성경 사전이나 성경 지도의 도움을 받고, 좋은 주석서를 통해 검증을 받는다. 어찌 되었든 기본적으로 본문을 집중해서 반복적으로 읽음으로 말씀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군에서 빌립보서를 읽으며 깨달았던 내용을 바탕으로 빌립보서 성경공부 교재를 작성해서 기독 동아리 후배들에게 보냈다. 후배들이 그 교재를 가지고 매해 해 오던 12일 성경공부 수련회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런 해설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군 상황에서 본문(그것도 한글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성경공부 교재가 많은 한계를 가진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20대 중반 청년의 성경 이해나 삶의 이해가 얼마나 미숙했겠는가? 하지만 그 교재를 지금 읽어봐도 그 많은 한계를 상쇄할 수 있는 신선함과 참신함이 있고 동시에 복음적인 주석의 틀을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 반복해서 읽기의 역사적 뿌리

성경의 한 권을 반복해서 읽는 성경 읽기 방식은 기독교 역사에서 꽤 오랜 전통방식이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는 지금과 같은 완성된 66권의 성경이 없었다. 구약성경은 완성된 형태였지만 권별로 두루마리 형태였고 매우 귀했다. 그리고 복음서나 바울서신은 단권 형태로 교회마다 돌려가며 읽었다. 성도들이 모이면 바울의 편지를 한 사람이 반복해서 낭독하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듣고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외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구약시대 필사본 성경이 희귀했기에 토라를 암기했던 전통이 신약 교회에도 그대로 내려왔을 것이다.

교부들의 설교도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다. 본문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는 형태였다.(분도출판사에서 펴낸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서신 강해를 보면 교부들의 설교 형태가 잘 나타나 있다.) 설교자가 본문 전체를 꿰뚫고 있는 상황에서 그 의미를 술술 설명하는 형태다. 당연히 설교가 2~3시간은 이어졌을 것이다.

 

성도들의 손에 들린 성경

성경을 일반 성도들의 손에 들려줄 뿐 아니라 성도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까지 돌려주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거기다가 인쇄술의 발달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뒷받침하는 물적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마어마한 영적 혁명은 성도의 삶 가운데 폭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성도들이 성경을 귀하게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치부하며 적극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주일 설교에만 의존하는 것은 사탄의 전략에 굴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역사를 통해 성경 읽기의 혁명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QT의 보급이다. QT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매일 읽게 하고, 짧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며 뜻을 스스로 파악하게 하며, 깨달은 내용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성경 읽기의 방법이다. 이러한 QT의 전통이 여러 선교단체를 통해 한국 교회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한국 교회가 가진 복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성경 읽기 전통을 활용하라

하지만 QT는 짧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기 때문에 그 본문이 속한 전체 문맥을 놓쳐버리고 자구에 얽매인 해석을 할 우려가 있다. 적용에 대한 과도한 강박증은 말씀을 도덕적인 부분에만 가둘 우려도 있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나 개인 차원에서 다른 보완책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 크게 우려할 부분은 아니다.

보완책의 하나로 QT와 함께 다양한 성경 읽기의 전통을 함께 제시하고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맥체인 성경 읽기와 같은 통독을 활용해도 좋고, 본문 전체를 반복해서 읽는 방법도 활용하면 좋다. 물론 바쁜 현대인의 삶의 리듬을 생각할 때 시간의 제약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QT를 하다가 한계에 부딪히거나 혹은 자신과 잘 맞지 않아서 고민하는 성도들은 일정 기간 다른 성경 읽기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성경의 풍성함을 접할 수 있고, 다시 QT로 돌아 왔을 때 QT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동양의 전통은 성경 읽기에도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일반은총의 전통이다. 나도 이번 7, 8월에 가족들, 또 뜻 맞는 교인들과 함께 갈라디아서 50번 읽기를 통해 이전 군 생활에서 경험했던 성경 반복 읽기의 은혜를 누리려고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자주 다른 본문을 가지고 성경 반복 읽기를 하여 말씀의 은혜를 다양한 통로로 깊이 접근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