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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너무 바빠서 묵상합니다(2018.01)

정병오 칼럼  

너무 바빠서 묵상합니다

 

 

감사, 그리고 변명

매일 아침 말씀 묵상한 내용을 A4 1면 내외로 정리해서 페이스북 등 온라인에 공유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20177월호 칼럼에 쓴 것처럼 시작은 가족 톡방에 올려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왕 정리한 내용이어서 여기저기 나누다 보니 지금은 상당히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있다. 나의 자유로 묵상 글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 없으면 언제든 그만두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늘 드리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이 칼럼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내가 묵상 글을 매일 아침 온라인에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다고 한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굳이 독자들이 관심도 가지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실을 주저리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느꼈던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를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데 대한 명분이 필요하기에 아주 가끔 한두 사람이 보였던 반응과 질문을 대다수의 독자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여기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그 바쁜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내나요?

우선, 그 바쁜 사람이 언제 시간을 내서 이렇게 매일 묵상 글을 작성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실 지금 내 상황이 두세 사람의 몫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쁘다.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더하여 전체 학교 운영을 위한 조율과 방향 설정의 역할을 맡고 있다. 2017년부터 새로 맡게 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공동대표 역할을 감당하다 보니 새벽 조찬 회의나 저녁 회의가 잦다. 여기다가 제대로 충실하게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교회 장로로서의 역할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그래도 지금은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다. 두 살 터울의 4명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정말 힘들었고 한 치의 시간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다 자라서 아무리 외부 일이 많다 해도 말씀 보고 묵상할 틈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바쁘고 힘들수록 본능적으로 힘을 충전하고 삶을 환기할 수 있는 장치를 찾기 마련이다. 이런 장치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말씀 묵상과 기도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가운데 말씀과 기도에 몰입하게 되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삶의 충전을 받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제대로 잠도 못 자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새벽기도를 하려고 몸부림쳤고, 요즘은 아주 작은 틈이라도 나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정리함으로 새 힘을 얻는다.

 

표현함으로 얻는 기쁨 두 배

그냥 묵상하는 것과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혼자 묵상만 하면 말씀을 읽으며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가볍게 메모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을 글로 정리하려면 단편적인 묵상을 씹고 또 씹으면서 그 내용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앞뒤 본문을 찾아 읽어야 하고 참고 자료를 찾아봐야 한다. 이러한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유익 또한 크다. 돌아보면 내가 말씀 묵상을 통해 제일 기쁨을 누렸던 시간은 대학 4년 동안이었다. 그때 말씀 묵상을 처음 배운 시기였는데 매일 아침 기독 동아리 선후배들과 모여 묵상 나눔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내가 묵상했던 내용을 내 말로 표현함을 통해 흐릿했던 내용이 정확하게 내 것으로 정리되고 체화되면서 말씀 묵상의 깊이와 기쁨을 더해 갔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말씀 묵상은 계속 이어 갔지만 그때만큼의 기쁨이 없었던 것은 거듭해서 정리하고 소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 말씀 묵상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면서 대학시절에 묵상한 내용을 말로 나누면서 느꼈던 그 깊이와 기쁨을 회복하는 것 같다.

 

내 묵상의 비법

실제로 내가 말씀 묵상에 투자하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50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체력이 저하되어 저녁만 먹으면 졸리고 아침에도 영 정신이 맑지가 않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은 주로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다. 이때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전체 말씀의 요지를 파악하고 중심 구절에 오래 머물고 핵심 내용을 마음에 되새기고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 이렇게 묵상한 내용을 주로 자기 전에 글로 정리한다. 혹 낮에 자투리 시간이 나면 그때 정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리한 글을 다음 날 아침 온라인에 올린다.

내 묵상의 비법은 문맥 파악이다. 성경 원어를 읽을 수 없는 나로서는 한 단어의 정확한 뜻이나 접속사의 의미, 한 문장의 정확한 시제 등을 파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주어진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며 본문의 흐름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본문뿐 아니라 본문의 앞뒤를 같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본문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묵상 본문을 잘 설명한 주석이나 연구서 1권 정도는 참고로 본다.

 

말씀이 말하는 만큼만 말하기

성경 묵상의 특성상 말씀과 내 삶을 연결시키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도덕적 교훈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비밀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특별한 감동이 잘 느껴지지 않는 본문도 있다. 본문의 특성이기도 하고 내가 말씀의 깊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만 파악하고 인위적으로 감동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만큼의 감동과 은혜를 누리고 그만큼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자칫 묵상 글을 정리하는 일이 남에게 나를 보이기 위한 작업이 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경계한다.

 

묵상의 위기들

지난 1년 동안 당연히 위기가 많았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내 속에서 어느 정도 숙성된 묵상 내용을 글로 정리한 날도 있었지만 시간에 쫓겨 숙성되지 못한 묵상 글을 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의 부족이든 내 영성의 한계든 그것이 부족함과 한계투성이인 인생의 한 단면이라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그대로 나누려고 했다. 이보다 더 큰 위기는 내가 묵상하고 정리한 내용과 내 삶이 과도하게 동떨어져 있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묵상 글을 나누기가 망설여질 때였다. 하지만 비록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진리임을 믿는 믿음으로 나눔을 계속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사 내가 묵상한 내용과 삶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이 기도 제목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매일 드리는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