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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사랑의 돌봄은 기적을 만든다(김수지 좋은의자 이사장_2016.3)

사랑의 돌봄은 기적을 만든다

 

 

 

 

 

김수지 (좋은의자 이사장)
우리나라 간호학 박사 1호. ‘사람돌봄’ 이론으로 간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제간호대상’과 ‘플로렌스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상하였다. 이화여대 간호대학장, 대한간호학회장, 한국호스피스협회이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이것을 계기로 총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11년부터 4년 동안 아프리카 말라위로 의료선교를 다녀왔고, 현재는 정서.심리적 약자를 돕는 ‘좋은의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임종화 / 사진·김현경

 

김수지 교수님은 ‘도움과 나눔’ 최영우 대표님을 통해, 정서·심리적 약자를 돕는 ‘좋은의자’ 창립총회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사람돌봄 워크숍’에 참석하여 오랫동안 정신질환자들과 함께하며 개발한 ‘사람돌봄’ 이론도 배우고 교수님의 삶도 듣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점점 정서·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져 선생님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 시대, 교수님과의 만남과 배움을 통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과 기대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학 박사시고, 간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제간호대상’을 수상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간호사가 된 동기와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초등학교 1학년, 여수순천사건 때 총상을 입은 청년을 밤새 간호하여 살려낸 아주머니가 “난 간호원이야.” 했던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살리는 간호원이 되어야지’ 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년 후 6.25전쟁이 나면서 각 도시마다 후송병원이 많이 생겼어요. 그때 학교 끝나면 후송병원에 가서 카트도 밀고 담배 심부름도 하고 위문편지 대필도 했어요. 대학을 갈 때까지 다른 것을 해보려고 생각한 적이 없이 간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간호사로 계속 일을 했죠.
그러다가 저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왔어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죠. 60년대 초만 해도 환자들이 심하게 아파야 병원에 왔어요. 병원에 오면 이미 말기 암인 경우가 많았죠. 당시 의료문화는 가족에게는 말하지만 환자에게 쉬쉬하는 분위기였어요. 환자가 ‘나는 무슨 병이냐’고 물어보는데, 주치의도 말 안 해주는 것을 간호사가 말할 수도 없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서 내적갈등이 심했어요. 죽는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채 돌아가시는 환자들을 보며 간호사로서 아주 힘들었어요. 이런 경험이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케어를 도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사람돌봄’ 이론도 마찬가지에요. 좌절의 경험이 계기가 되었죠. 정신과 환자의 발병은 오랜 기간이 걸려요. 치료와 재발도 마찬가지구요. 환자와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면서 겪은 좌절과 힘듦에 머무르지 않고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간호를 할까 고민하고 연구하여 정리한 것이 ‘사람돌봄’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왜 의사가 안 되고 간호사가 되었냐는 질문을 하세요. 의사와 간호사는 달라요. 의학은 신체 일부분에 나타난 병리현상에 포커스를 두고 그 원인을 찾아 진단, 치료, 처방을 한다면 간호학은 그 병리현상 때문에 고통과 아픔을 겪는 환자들을 돌보는 거예요. 고통과 아픔은 그 부위에만 있지 않고 전인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전인적인 케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간호학은 생리학, 병리학, 해부학을 비롯하여 약리학, 심리학, 사회학, 인간관계학 등과 함께 영적인 것까지 포함한 교과과정을 배워 다루어요. 결국 간호학은 사람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학문입니다.

 

은퇴 후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배우시게 된 건가요?
네, 그렇죠. 지역사회에서 정신과 환자들과 일하다 보니 사회복지학에 대해 배울 필요를 느꼈어요. 인간 생활의 단위가 가정, 학교, 지역사회잖아요. 그래서 학교 보건, 지역사회 보건이 있고요. 지역사회 보건을 하려니 사회의 복지시스템을 알아야겠더라고요. 병들면 치료하고 재활하는 것이 사회 정책 안에서 실현될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이 회복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변화시키고 삶을 성장시키는 것은 사회 시스템이 받쳐줘야 가능하거든요. 특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교육시키고,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해요. 결국에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은 교육이죠. 그래서 현재 교육 형태로 자조(自助)모임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배운다는 행위 자체가 정신건강에도 아주 중요하지요.

 

‘사람돌봄’이론부터 정서·심리적 약자를 위한 ‘좋은의자’ 창립까지, 정신 질환자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으신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간호사가 된 후, 처음에 분만실에서 근무했어요. 분만실은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가 있어요. 살아있다는 느낌, 희열 같은 것이 있죠. 내과, 외과, 응급실, 노인병동, 암병동을 거쳐 정신과엘 갔는데 당시 정신과에는 치료라고 할 것이 없었어요. 약 주고 지키는 것이 전부였어요. 가령 불안한 환자의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약은 투여하는데, 그 불안을 감소시키는 간호는 어떻게 하라는 지침이 없음을 발견했어요. 이런 실습의 경험이 제가 정신과간호를 전공하게 된 동기가 되었죠.
그러다가 제가 간호 석사 공부할 때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막 오신 이호영 교수님을 만났어요. 그분은 의대 교수님이셨는데 간호학 공부하는 제가 첫 제자로 1:1수업을 받게 된 거에요.
그분은 주로 공황장애나 신경증 환자들을 돌보는데, 참 인간적으로 돌보셨어요. 그때는 의사선생님들이 권위적이고 환자에게 약 처방하는 것이 거의 주 업무였던 시절인데 이 선생님은 늘 환자에게 존대하고 환자 이야기를 듣고 그러셨어요. 그때 ‘아, 환자와의 관계가 정말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배웠어요. 선생님 덕분에 현상학적으로 정신 환자를 보살피고, 삶을 관찰하면서 어떤 예후 인자가 더 좋은지 연구하는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수님의 가르침을 잊고 있다가, 간호학 박사가 되고 정신과 병동에서 학생들과 실습하며 다시 기억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어떤 계기로 병원에서 학생실습을 하지 못한 채 연구만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간호라는 것이 환자와의 만남이 없으면 정말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실제로 간호를 하지 않고 강의와 연구만 하니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환자를 2년 동안 못 봤는데 그 기간 중에 전공을 바꿀까, 학교를 옮길까 고민할 정도로 제 인생의 좌절기, 암흑기였어요. 그때 남편의 조언을 받아 때를 기다리며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연구도 연구 대상이 있어야지요. 실제 사례가 없으니까 연구도 잘 할 수 없고, 강의도 신이 안 나고. 정말이지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힘든 시기 후에 정신질환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연이 궁금합니다.
맞아요.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토요일, 날짜도 기억이 나요. 1982년 8월 13일이었어요. 그때 토요일은 반공일이라고 해서 오전에도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 끝나고 집에 가려고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밖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놈 잡아라!’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문이 벌컥 열리는데, 정신과 환자 한 명이 뛰어 들어오고, 그 뒤를 수위아저씨가 쫓아 오고 있었어요. 이 환자는 입원했다가 퇴원한 환자인데, 한여름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이 딱 봐도 정신병자에요. 저는 우선 수위 아저씨를 보내고 환자에게 냉수 두 컵을 떠다줬죠. 물을 들이키고 난 환자 입에서 “휴, 살았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더라고요. 그리고는 4~50분 정도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어요.
그분이 “정신과 환자가 퇴원해서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집에서는 쉬쉬하고, 학교도 직장도 못 다니고, 사람들은 다 나를 피한다. 우리가 전염병 환자도 아니고, 뭘 잘못했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저를 딱 가리키더니, “선생님은 왜 입원환자만 봅니까? 길에 나가보세요. 저 같은 미친놈들 많이 돌아다녀요!” 하는 겁니다. 그분 말이 사실이었어요. 저는 그때 정말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러네요, 그런데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난 후 말끔하게 씻겨서 내보냈어요. 그 꼴로 나가면 또 붙잡히니까요. 나가는 길에 이 환자가 “또 와도 돼요?”라고 묻기에 토요일 3시, 외모를 단정히 하고 오라 말했죠. 그때부터 12주 동안 개인면담을 했어요. 대화를 통해 주로 일상생활에서 겪는 실제적인 어려움,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하나 하나 짚어 가며 간호과정을 적용하여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개는 것부터 해서 방청소, 개인위생, 하루생활을 일지 형식으로 쓰는 것이 숙제였어요. 일지를 보면서 ‘이건 참 잘했습니다’ 칭찬도 해주고 환자 자신의 느낌도 듣고요.
4주 차 되던 토요일 아침, 여자 분이 전화를 해서는, 우는 거예요. ‘제가 쫛쫛에미’라고 하면서 “오늘 아침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거예요. 아들이 고2 때 발병을 했는데, 그때부터 ‘엄마가 날 잘못 키워서 그렇다, 나를 왜 낳았냐?’ 소리 지르며 때로는 손찌검까지 했다고 해요. 결국 아이 일로 이혼을 하고 식모살이하며 어렵게 지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밥상에서 처음으로 엄마 손을 잡고 “엄마, 밥 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님께 아이에게도 지금 나에게 말한 것처럼 똑같이 마음을 표현해주시라고 말했어요. 또 정신 질환은 발병이 서서히 일어나듯 치료와 회복도 천천히 되니 마음 조급히 먹지 말고 아들의 말을 잘 들어주며, 아들에 대한 감사한 느낌을 말해주라고 했죠.
이 친구와 약속한 것도 있었어요. 12주 동안 약을 빼먹지 말고 잘 먹자는 것이었죠. 제가 자주 하는 말인데요. 약 먹는 것은 안경 쓰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안경을 썼는데 그때는 안경 쓰면 병신이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는 상관이 없었어요. 쓰면 잘 보이니까. 정신과 약도 똑같거든요. 먹으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면 되는 거죠. 제가 가족력으로 혈압이 있는데, 혈압약을 먹음으로서 혈압조절이 되어 정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거죠.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고착되고 나면 상대를 고려하지 못해서 대화가 어려워요. 자존감이 낮아서 ‘몰라요, 못해요, 싫어요.’ 라는 말을 주로 하구요. 이 환자의 경우에도 고등학교 때 발병 후, 계속 그런 상태로 자기 스스로를 대해 온 거죠. 12주 과정이 끝날 때쯤에는 많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잘하고 특히 엄마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삶에 자신감이 생기고 대화 내용도 풍부해졌어요.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돌봄’ 이론을 연구하시게 된 건가요?
네. 이 환자와 12주 동안의 만남을 마치고 나니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2주 만에 13명이 되었고, 같이 집단상담을 하게 됐어요. 진단명이 모두 정신분열병(조현병)이었고, 평균 14.9년의 유병기간을 가진 26~54살의 환자들이었어요. 매주 한두 명씩 발병 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애 스토리를 나눴지요. 그때 어떤 통찰을 얻게 된 거죠. 그분들이 삶을 나누면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데, 어떤 계기 때문에 다르게 살게 되었어요.’라고 얘기하는데, 그 변화의 포인트가 ‘누가 나를 도와줬어요, 돌봐줬어요, 간호해줬어요.’ 등이었어요. 그래서 ‘돌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죠.

 

‘사람돌봄’이론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정신분열증 환자들과 집단상담을 하며 이들이 어떤 돌봄 경험을 받았는지를 양적·질적 연구방법을 통해 고급통계를 활용하여 조사했습니다. 처음 3회에 걸친 반복연구에서 189개의 단어들이 8가지 유형으로 정리되었어요. 그리고 더 많은 집단을 대상으로 2회 반복한 연구에서 최종 10가지 돌봄 유형이 나왔어요. 이를 정리하여 ‘대인적 돌봄 Interpersonal Caring’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환자가 이름이 너무 어렵다며 ‘사람돌봄’이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이름을 바꿨죠.1) 이 이름이 좋은 이유는 환자가 수동적으로 돌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것이에요.
‘사람돌봄’이론은 병원에서나 병원 밖 가정, 사회, 등 어느 곳에서도 적용이 되는데, 효과는 환자들과 가족들 등 당사자들이 제일 먼저 알아봐요. 워크숍을 하면 환자 어머니들이 이렇게 간단한 건지 몰랐다며 기뻐하지요. 실제 이혼을 앞둔 부부들에게도 이런 워크숍이 효과가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어떤 관계에서도 이 이론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얘기를 듣고 ‘좋은의자’ 재단설립을 준비하던 ‘도움과 나눔’의 최영우 대표가 공개강의와 워크숍을 제안했어요.

 

그렇다면 이런 워크숍을 통해 ‘좋은의자’을 발기하게 된 건가요?
사실 지금 하고 있는 노인공동생활가정인 ‘사랑의 집’을 운영하기가 벅차서 최영우 대표를 만나 컨설팅을 받았습니다. 제 어려움과 함께 ‘사람돌봄’이론을 듣고, 최 대표가 정서·심리적 약자들을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보자고 했어요. 만들어 놓고는 글쎄 저보고 이사장을 하라는 거예요. 저는 ‘사람돌봄’이론을 간호분야에만 적용시켰었는데. 공개모임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와 입장, 영역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죠. 주위에 우울, 불안 등 정서·심리적 문제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고, 또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한 분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럼 ‘좋은의자’는 한마디로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세상에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은 없어요. 완전은 곧 건강과 같은 말이거든요. 건강을 수치로 측정했을 때 극에서 극까지 사람들이 다 분포해 있거든요. 정서·심리적 약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는 어느 수치에 걸려있느냐의 차이뿐이에요. 타고나면서부터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약한 사람들도 있어요. 같은 환경에서 같은 밥을 먹고 자란 형제도 정신·심리가 다른 것처럼요.  그런 사람들은 타고났기 때문에 환경을 그 사람에게 맞춰주어야 해요.
체온이랑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릴 만들 때 정상 체온을 36.5도로 만드셨잖아요. 이때 면역력이 가장 강해요. 균이 침입하면 몸이 맞서 싸우느라 체온이 올라갈 때도 있는데, 문제는 체온이 떨어질 때에요. 체온 1도가 떨어지면 면역력은 5~6배가 낮아져요. 그래서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가 빨리 옷을 껴입고 몸을 따듯하게 보호하지요. 정상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따뜻한 환경으로 맞춰주는 것처럼 정서·심리적으로 약해진 우리 모두에게도 따뜻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좋은의자는 정서·심리적으로 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사회에 밝고 건강하게 적응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우리 사회 전반에 펼쳐 나가려 합니다. 구체적 활동으로 가정, 학교, 직장, 교회 등 다양한 생활공간에서 정신건강증진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며 정서·심리적 약자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자조모임 지원과 네트워크 구축, 인식개선 및 홍보, 교육과 교류사업, 사회적응을 위한 구직 및 재능기부를 통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사회적 기업 및 협동조합 형식의 직업창출 등 구체적인 활동들을 펼쳐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환경이 그렇게 맞춰주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약자들에게 우리나라 교육환경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렇죠. 우리사회가 너무 경쟁 중심이예요. 교육이 사회 모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교육이 위기라고 하는데, 그게 다 교사 탓은 결코 아니에요.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문제지요. 다들 대학교 졸업하면 1등 기업만 가려고 해요.
저는 이런 경쟁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자족할 수 있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인들을 분석해 본 적이 있어요. 위인들은 어떻게 스스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었을까 고민해 보았어요. 예를 들어 에디슨, 케네디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게 대해주고 북돋워주는 엄마가 있었어요. 사고의 기준을 바깥에 두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두는 거지요. 자신감이 들면 시너지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우리 모두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거든요. 나는 허상이고 바깥만 보고 살아요. 워크숍에서 ‘나 알아보기’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요.
최근 워크숍 때 이런 내용을 간호 분야뿐만 아니라 부부, 부모 자녀, 회사·학교 내 관계 등 어떤 형태로도 적용시킬 수 있을 거라는 통찰력을 얻었어요. 좋은교사운동에서도 학교에서 이런 것들을 잘 적용해 나가면 좋겠어요.

 

학교에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교사들은 그런 아이들을 대할 때 어쩔 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이 아이들을 바라보고 돌볼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교사들이 ‘사람돌봄’ 이론을 체험적으로 알았으면 해요. 사실 교사들은 늘 학생을 대하기 때문에 잘 배우기만 하면 알아서 잘 적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우리 반의 그 아이에게 이렇게 해야겠구나’ 이렇게요.

 

여기서 잠시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최근까지 아프리카 말라위에 선교활동을 하고 오신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다녀오신 건가요?
사실 말라위를 갈 생각은 못했어요. 2003년에 남편이 소천한 후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 곳에서 재미있게 일하다가 귀국하여 서울 사이버대학 총장을 하며 행정에 집중하다 보니 원래 하던 간호 관련 일들을 전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10년, 그 해가 세계 간호사의 해였는데 7월 시카고 코스타 강사로 가게 되었어요. 코스타 집회 마지막 날 이동원 목사님이 1,200명의 학생과 강사들에게 도전을 하셨는데, 앞으로 2년간만 해외 선교에 투신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때 마침 일본 대학에 석좌교수로 가게 되어있어서 일본에 선교사로 갈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GPTI(전문인선교훈련원)에서 선교훈련을 받았지요.
이 훈련이 12월 15일에 끝났는데 12월 22일에 백영심 선교사가 말라위에서 저를 찾아 왔더라고요. 말라위 대통령이 말라위에 간호대학을 새워달라고 해서 간호대학을 만들고 교수도 4명을 뽑아놨는데 학장이 없다며 학장을 해달라는 거에요. 저는 일본에 가야 하니 젊은 사람 소개해주겠다고 했는데도 안 된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번에 귀국해서 신체 검진했는데 암이에요. 27일에 세브란스에서 수술 받아요.” 하는 거예요. 세상에 우연은 없는 것 같아요. 마침 제가 그때 ‘울지마 톤즈’를 봤는데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왜 하나님이 그 신부님에게 사람을 붙여주지 않았을까?” 의사인 신부님 혼자서 진료에, 환자 심방에, 미사집전에, 음악까지 가르치는 것을 보며 왜 그 곳에 돕는 사람을 보내지 않고 혼자 두셨는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이분이 암이라고 하니, “기도해보죠.” 하고 헤어졌습니다.
수술 전날 선교사님을 찾아갔더니 베갯잇에서 비행기 스케줄을 꺼내 주시는 거예요. 보니까 1월 1일 출국인데, 저와 저를 데리고 갈 사람까지 두 명 스케줄이었어요. 그때 딱 한마디 했죠. “선교사님 참 믿음 좋네요.”
그렇게 1월 1일 출국하여 1월 2일 말라위에 도착해서 1월 4일에 입학식하고 학생들 가르치기 시작했죠. 그 후 매년 2월, 10월에 한국 왔는데, 올 때마다 “2년만 하고 올게요, 1년만 더 하고 올게요.” 했죠. 그렇게 4년을 말라위에 있었어요. 우리 ‘사랑의 집’ 할머니들이 배신자라고 했어요. 저는 하나님한테 그랬죠, “하나님 들으셨죠, 제가 배신자 됐어요.”(웃음)
그 학교가 작년 종합대학교가 됐어요. 처음에 3년제로 시작했는데, 병원에서 일할 인력밖에 못 키우고 인구의 85%가 사는 전통시골에서 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간호 외에 보건간호사와 조산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교과과정을 개발하여 2013년부터 4년제 대학 학사과정(BSc. in Nursing & Midwifery)으로 승격시켰지요. 말라위 교직원들은 죽어도 안 된다고 했는데. 말라위 사람들에게 필요한 보건인력이 뭔지 생각해보자고,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가장 좋을 때 주시지 않겠냐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다들 같이 힘을 모았죠. 감사한 것은 옛날 박사과정에서 저와 함께 공부했던, 퇴임을 앞둔 미국인 교수 15명이 4년 동안 교대로 와서 가르치고 돌아가고를 반복하며 도와준 것입니다. 그동안 현지인 교수 10명이 석사를 마쳤고, 이제 이들이 가르칠 수 있게 되었죠.

 

교수님이 쓰신 <사랑의 돌봄은 기적을 만든다> 책을 보면 간호의 조건을 ‘정직, 세심, 공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교사에게도 동일하게 통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교사운동 선생님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한국은 체면사회라 그런지 정직이 몸에 안 배어있어요. 늘 익명의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지를 못해요. 그런데 대체 다른 사람이 누구냐는 거죠. 사랑을 베이스로 한 정직이 개개인에게 필요해요. 그리고 세심해야죠. 지금 이 시간, 나에게 맡겨진 환자를 주님께 하듯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것이 ‘세심’이에요. ‘공평’은 필요한 간호를 누구나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미국은 간호사실(Nurse’s Station)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기 환자들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병실 구조도 돈 있는 사람이 좋은 곳 쓰거든요. 이건 공평한 게 아니지요.
돌봄이나 간호도 크게 보면 교육이에요. 한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그 사람을 맡는 거죠. 학생은 배운대로 해요. 학생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존재가 교사 아닌가요. 지금 돌이켜봐도 선생님한테 배운 공부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그 선생님이 날 어떻게 대했는지는 기억이 나요. 일대일로 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 내가 멋대로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빚어가도록 옆에서 사랑으로 돕는 것, 그것이 교육 아닐까요?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마치며 사람을 만나는 것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 그리고 누구나 어떤 영역에서는 약자이기에 우리 모두가 불편함과 소외를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돌봄과 교육이 만나는 지점, ‘좋은교사’와 ‘좋은의자’가 만나는 지점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고, 그곳에 우리가 품어야 할 아이가 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