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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가장 큰 죄, 영적 은사와 권위 사유화(2016.11)

정병오 칼럼


가장 큰 죄, 영적 은사와 권위 사유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몇 해들이 기억이 난다. 그 중 한 해가 대학 4학년 때인 1987년이다. 그 해는 시대적으로는 6월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던 해였다. 비록 야권의 분열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의 전환점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다. 이 해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복음주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맞았던 해였다.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 외에 사회참여를 통한 세상변혁도 기독교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다양한 실천과 시도들이 이 때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이 해에 시작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많은 부분에 실제로 참여를 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시기였다. 대학 3학년 때 선교단체 대표 사역을 감당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보통의 경로는 4학년 때는 대표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선교단체 사역도 잠시 접고, 자신의 진로를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표 사역을 하면서 우리 선교단체 내 영적인 상황을 보고 느낀 터였다. 그 상황이 나를 짓눌러서 모든 짐을 후배들에게만 떠넘길 수가 없었다. 행정적인 일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지만 계속해서 내 눈에 보이는 영적인 돌봄의 필요를 외면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나는 나의 진로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통한 학문의 길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어디에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우리 시대가 처한 모순의 핵심으로 들어가 복음으로 그 문제를 푸는 답을 제시해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야말로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쁨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선교단체 내 영적으로 연약한 후배들을 돌보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역이 당시 1학년 신입생이던 87학번 5명으로 구성된 소그룹의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의 기초가 단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세윤 목사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와 김홍전 목사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책을 교재로 삼고, 우리가 믿는 구원의 도리와 복음의 풍성함에 대해 한 학기 정도 공부를 해나갔다. 동시에 경건의 훈련으로서 QT와 기도생활에 대한 훈련과 점검을 꾸준히 해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이 복음에 굳게 서가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 모습은 나에게 큰 격려와 활력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보니, 그들 삶에 대한 영적 권위가 나에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삶의 근본을 바꾸어 주는- 복음을 전해주고 그 복음이 삶의 원리로 정착되고 훈련되도록 한 학기 동안 시간과 정성, 기도를 쏟아준 사람이었다. 이러한 권위의 행사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매일의 삶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아가는 부분까지는 매우 분명하고 선명했다. 이 부분들과 관련해서 나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에게 권면하고 그들의 삶에 개입을 했다.

 

영적 권위의 행사, 그 한계는 어디인가?

이러한 영적 개입이 복음에 대한 기초를 닦는 일을 넘어 복음으로 살아가는 각 사람의 구체적인 부분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어려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삶은 단지 영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진로 선택, 이성교제, 교회생활, 취미생활, 정치적 가치 등의 문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적인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리더의 판단과 실제 그 삶을 살아내는 사람의 판단이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서운함을 느꼈고 내가 가진 영적 권위를 가지고 그들에게 더 강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로서는 최대한 사랑의 동기로 그 권위를 행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삶의 깊은 부분까지 나의 영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사심 없이 그들의 성장을 위해 온갖 희생과 기도와 눈물로 권면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이 100%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비록 둘러가더라도 그들을 인격적으로 이끌고 계신데 나는 내 확신을 가지고 과도한 권위를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정말 깊이 들여다보면 내 속에 사심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사심 없이 교인들을 섬겼던 사도바울조차도 자신의 목회와 돌봄에 대한 열심이 지나쳐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늘 주의하며 자기 한계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린도후서 124)

 

치명적 유혹, 영적 권위의 사유화

연이어 드러난 목회자들의 성범죄로 인해 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러한 범죄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목회자에게 주어진 영적 권위를 사적인 권위로 활용해버린 치명적인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사적인 자산으로 취급하여 목회직을 가족에게 세습하는 것도 본질상 같다. 영혼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권위를 개인의 소유로 취급하고 이를 통해 성적.물적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여, 결국 영혼과 교회를 망가뜨리는데 사용했으니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범죄인가!

이런 죄는 분명하게 드러난 경우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적 권위나 은사를 사유화하여 개인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나만 하더라도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할 때 내게 주어진 권위와 권한을 내 욕심이나 명예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얼마나 많이 받았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사용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학교에서 교회에서 혹은 여러 모임에서, 그것을 섬기라고 주어진 크고 작은 권위와 권한을 사적인 것으로 전용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돌아보고 돌아볼수록 부끄러울 따름이다.


영적 싸움의 최전선

따지고 보면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내 생명, 건강, 가족, 직장, 지식, 은사, 권위 등 모든 것이 주님의 나라와 교회, 이웃을 섬기라고 주신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이것들이 나의 수고로 내가 만든 나의 소유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쉽게 자랑하고, 교만하고, 판단하고, 주관하려고 하고, 조급해하고, 실망하고, 섭섭해 한다. 나아가 실망시키고, 다툼을 만들어내고, 상처를 주고,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외형적으로 일은 잘 했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고, 영혼이 성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머리됨이 드러나지 않고, 지체간의 하나됨이 증진되지 않고, 세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살아갈수록 느끼는 것은 인생은 넘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 넘어짐의 핵심에는 주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원래부터 자기의 것인 것처럼 여기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데 있다. 또 이러한 유혹은 살아가면서 여러 면에서 가진 것이 늘어날수록 더 많아진다. 그러하기에 더욱 깨어 주의할 일이다. 더욱 민감하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