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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플라톤과 함께, 고전공부의 길을 찾아서(2016.8)

정병오 칼럼

 

플라톤과 함께, 고전공부의 길을 찾아서

 

누구나 자기만의 로망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지금당장 이루는 건 불가능하지만 최소한의 여건만 갖추어진다면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꿈같은 것 말이다. 로망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클수록 더 커지게 마련이다.

 

교과서를 넘어, 고전을 활용하기

교사로 살아오는 동안 교과서라는 존재가 늘 답답했다. 원론적으로 교과서는 수많은 교육 자료 중 하나에 불과한데, 실제 교실 수업에서 마치 성경처럼 사용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가급적 교과서 활용을 최소화하려고 애를 썼다. 교과서에 나오는 주제를 가르치되 그 주제와 관련하여 아이들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양한 자료나 사례를 활용하려 했고, 꼭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교과서에 있는 주제를 빼기도 하고 없는 주제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교과서를 벗어난 자료를 구할 때는 1시간 단위로 끊어진 수업시간이나 30명이라는 학생 수 등 수업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완결된 형태의 좋은 글을 수업자료로 활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중·고등학교 수업에서는 교사가 여러 좋은 자료를 요약해서 전달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주제와 관련해 아이들이 실제 삶에서 느끼는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고 적용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인류 역사상 검증된 좋은 글을, 요약된 문장으로 읽는 게 아니라, 원저자의 논리와 생각의 흐름을 따라 읽어 본다면 유익하지 않을까? 그 글을 이해해보고 질문을 던져본다면, 현재 갖는 의미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아이들의 지적 세계를 열어주는데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달려야 논리>에서 <파이돈>까지

작년부터 오디세이학교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내가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시도해보고 있다. 이번 학기에 내가 맡은 과목은논리였다. 그래서 우선 전반적인 논리학의 기초를 심어주기 위해 탁석산 씨가 청소년을 위해 쓴 3권짜리 논리학 교재인 <달려라 논리>를 주교재로 선택했다. 그리고 이 책을 어느 정도 소화한 후에는 플라톤의 <파이돈>을 같이 읽으며 플라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어떤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지 같이 살피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달려라 논리>는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눈높이로 쉽게 쓴 책이긴 하지만 논리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이돈> 읽기에 들어서자 내용이 너무 어렵다며 포기하는 아이들이 좀 더 생겼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내가 미리 나눠준 질문지에 따라 <파이돈>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 가운데서 느낀 자신의 생각이나 질문들을 수업 시간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수의 아이들은 플라톤의 논리를 따라 읽는 맛을 조금씩 느껴가는 것 같았다.

 

다시, 플라톤에 매료되다

모든 수업이 그렇지만 이번 학기 수업을 통해서도 제일 많은 유익을 누린 사람은 나였다. 논리수업을 가르치기 위해 <달려라 논리> 외에도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 공부했던 논리학 책들을 다시 읽으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보다 <파이돈>을 여러번 꼼꼼히 읽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매력에 매료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철학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물질적 감각적 차원을 뛰어넘어 정신적이고 본질적 차원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내어 놓은 철학적 사유의 깊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일반은총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러한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에 어떤 면에서 영향을 주었을지 파악이 되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학창시절 맛보았던 고전 읽기

초등학생 시절엔 책을 참 좋아했던 나였지만,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다른 책은 거의 읽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땐 한국 단편 문학 15편을 읽고 소감문을 써 오라는 숙제가 있어, 한국 단편 문학에 푹 빠질 수 있었다. 프랑스어 선생님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고 두 여자의 생애를 비교해오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는데, 그 덕에 프랑스 문학 작품도 접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특히 기억에 남는 수업은 손봉호 교수님의사회와 사상이었다. 이 과목에서는 철학 고전 10권을 읽고 보고서를 내는 것이 필수 과제였다. 당연히 수업을 신청한 인원이 매우 적었다. 하지만 나는 수업을 들은 덕분에 이름만 알고 있던 고전을 읽었다. 이때 알게 된 고전 읽기의 맛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이후 내가 속해 있던 선교단체의 방학 중 모임 교재도 칼빈의 <기독교강요>, 헤르만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 등으로 바꾸었다. 우리의 신앙을 성숙케 하는 데도 기독교 고전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 여러 권의 경건서적을 읽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학교 밖 그리고 외국 사례, 우리학교에서는 안 될까?

물론 일반 중·고등학교 상황에서 고전 읽기 교육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학교 밖 인디고서원의 고전 읽기 교육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 기독교 내에서는 로고스서원이 조금씩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안학교나 홈스쿨 등에서의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의 교육과정은 졸업까지 100권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시대가 급변하고 미국 사회도 경쟁의 심화와 취업난으로 대학 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세인트존스대학의 고전 100권 읽기 교육과정은 더 주목을 받는다. 우리의 경우, 학생부 종합 전형이 중요해지면서 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느라 뺑뺑이를 돌고 있다. 여러 활동을 대폭 삭제하고 고전 30권 읽고 토론하기를 학교의 주요 특색 교육과정으로 삼고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이와 관련된 자료를 남겨보면 어떨까? 그러지 않아도 대학에서는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이 비슷비슷해서 구분을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인데, 진정성 있게 운영한다면 눈에 띄지 않을까?

 

책 읽기, 변함없는 역량이 아닐까

1학기 논리수업을 마무리하면서 ‘2학기에는 인문고전 10권 읽고 토론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해 보자는 제안을 했다. 몇몇 아이들이 좋다며 기대를 표시했다. 일단 내 머리 속에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플라톤의 <크리톤>,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성룡의 <징비록> 등이 떠오른다. 방학 중에 책을 더 찾아보고 아이들이 모아지면 의견을 더 모아보려고 한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현재 존재하는 직업 가운데 어떤 직업이 남을지 어떤 직업이 사라질지, 또 어떤 직업이 새로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교사는 학생들에게 끝까지 남을 직업을 찾으려 골몰하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어떤 직업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물론 어떤 직업에도 적응할 수 있는그 능력이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책을 읽고 그와 관련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능력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검증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능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