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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걸어서 바다까지(2016.6)

정병오 칼럼

걸어서 바다까지




작년부터 오디세이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학교의 한 그룹인 ‘오디세이 하자’ 학생들과 교사들이 지난 4월 말, 9박 10일 동안 도보 여행을 다녀왔다. “걸어서 바다까지”라는 구호 아래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낙산 바다까지 하루 평균 30km 이상을 걷는 일정이었다. 저녁을 먹고 몸을 씻은 후에는 하루 일정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여행 중에 발생했던 많은 문제에 대해 이유를 묻고 의견을 교환하며 해결책을 찾는 회의도 가졌다. 이 시간은 짧게는 2시간, 길게는 3~4시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나는 다른 일정 때문에 하반기 4박 5일간만 동행했다.


여행을 통한 변화

여행 전, 우리가 여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인지 교육했고 회의도 많이 했다. 체력 훈련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제 여행에 임하자 첫날부터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아이들이 있었고, 과도한 물집이 생기거나 발목을 다친 아이들도 있었다. 피곤함을 호소하며 혹은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여 포기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나타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례도 많이 나타났다. 여러 이유로 걷기에 동참하지 않고 차량을 탑승한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실히 걷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걷기에 동참하려고 했다. 함께 정한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아이들도 밤에 이루어지는 회의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스스로 느끼면서 고쳐가기 시작했다.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자 아이들은 육체적으로 더 피곤해졌지만 정신적인 결속은 더 커져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공동체에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고 겉돌던 아이는 점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깊어졌다.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 체력이 약한 아이들을 돌보며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했다. 처음에는 여러 상황에 대해 불평도 있었으나 갈수록 불평이 사라졌다. 교사들이나 친구들 사이에 크고 작은 실수와 연약함도 그대로 수용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교사들의 역할이 적어졌다. 아이들이 스스로 대열을 갖추어 움직이고 교사들은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가 되었다.


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보 여행을 위해 교사들은 수많은 회의를 했고 답사도 여러 번 갔다 왔다. 만약 있을 상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도 실제 여행 과정에서는 아이들이 주체가 되도록 구조를 짰다.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물꼬를 틔워주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 트인 물꼬를 통해 아이들은 자유롭게 흘러가면서 배움을 마음껏 만들어 갈 수 있다. 

교육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함께 나누는 과정이다. 우리의 일정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걷는 것이었고, 중간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면 밤늦게 별을 보며 걸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 느꼈던 것, 있었던 모든 일을 꺼내놓고 충분히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졸음과 피곤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육체적 경험이 교육적 경험으로 체화되는 것을 아이들이 스스로 느꼈다. 아이들은 모두 불평 없이 참여했다. 

우리는 배움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참다운 배움을 경험한다면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옛길과 새길

우리는 가급적 차량 통행이 적은 지방도를 이용했고 가끔은 산길을 통과하기도 했다. 요즘 새로 난 길을 차로 이동할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새로 난 국도를 지날 땐 곳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최대한 빨리 달리는 것만이 목표다. 그런 도로는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고 고가를 세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옛길은 달랐다. 사람들 삶의 연결 고리면서, 자연과 최대한 조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처음 이 길을 만든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맨 처음에는 어디에도 길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주위 사람들과 연결하기 위해 길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옛길을 걸으며 그 길을 만들고 걸어갔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수많은 상상이 되었다. 중간 중간 들른 식당이나 민박집 주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급속도로 변화를 거치고 있지만 여전히 그곳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각 지역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표인가? 과정인가?

서울에서 강릉이나 속초, 양양에 빨리 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라면 지금처럼 산을 깎고 터널을 뚫으면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지역을 살피고 자연을 느끼는 것이 의미 있다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 모두 의미 있다면, 옛길과 새길 중 어느 길을 선택할까? 곧게 뻗은 새길 보다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는 옛길이 더 좋겠다. 아무 방해 받지 않으며 빨리 달리는 교통수단도 필요하지만, 때로 두 발로 걷고 온 몸으로 느끼며 사람들 만나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의 교육과 삶도 그렇다. 지금 우리 교육은 선호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그 이후에는 안정되고 급여가 많은 곳에 취업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아이들을 몰아가고 있다. 이 흐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 하지만 그 교육 속에 내몰린 아이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원하는 대학과 직장을 손에 쥐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목표 달성에 실패하거나 더디게 성취한다. 우리 삶은 이런 이들을 낙오자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한편 이 흐름에 충실하게 몸을 싣고 원하는 대학과 직장을 얻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의 삶 역시 얼마나 피폐하고 빈곤한가?


천천히 가도 괜찮아

강릉이든 속초든 양양이든 목적지를 향해 갈 때 모든 길과 자연, 마을과 사람들의 존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어떨까? 설혹 중간에 정말 좋아하는 마을을 만나면 그곳에 눌러 살아도 좋지 않을까? 좋아하는 자연과 사람을 만나면 충분히 누리고 느끼고 이야기 하고, 천천히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현실적인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사회구조적으로 그런 떠남을 뒷받침 해주지 않는데 개별 가정이나 개별 교사, 개별 학교가 갖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럴수록 본질을 선택하는 개인과 가정과 학교의 시도가 있다면 좋겠다. 당장은 현실 가운데 어려움 겪더라도 내면으로는 기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럼 사회구조적인 변화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을 시도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