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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몸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2016.5)

정병오 칼럼

몸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작년 말부터 오십견이 왔는지 왼쪽 어깨와 팔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게으름 때문도 있고 웬만해서는 병원을 찾지 않고 스스로 병을 이겨보자는 고집이 있어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면서 낫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낮에는 괜찮다가도 밤이 오면 팔이 아프기 시작하고, 통증 때문에 새벽에 잠을 깨는 날이 반복되었다. 지금은 내 고집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의원 신세를 지며 언제 나을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생 동안 거의 자각하지 못했던 내 팔과 어깨의 존재를 순간순간 자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존재로 만드셨다. 영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영혼에 육체를 결합하여 어떤 존재를 만든 것은 새로운 시도, 하나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육체는 영혼과 달리 그 자체로 시공의 제한을 받고, 질병과 고통에 노출되어 있으며, 감각과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육체를 인간 한계와 죄악의 근원으로 보고, 육체를 벗어나는 것을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로 제시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한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고(苦)를 겪어야 하고, 고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행을 통해 모든 육체의 욕망을 끊고 육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당대 권력으로부터 억울한 모함을 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탈옥을 권하는 제자들의 권유를 단호히 물리친다. 죽음은 육체의 감옥을 벗고 영혼이 온전히 자유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며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독배를 마신다. 육체와 죽음을 대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자세는 이후 스토아학파로 이어지며 서양 정신은 물론이고 기독교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육체에 대해 불교나 서양 철학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성경은 육체 자체가 죄의 근원이라거나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죄의 근원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죄의 근원이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의 반역으로 인한 영향 아래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육체를 억압하거나 벗어나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행동이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다.
단, 성경은 육체의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이 한계를 제대로 알고 이를 인정하기만 하면 경건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또 성경은 기본적으로 식욕, 수면욕, 성욕 등 육체의 감각이나 욕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한다. 다만 이것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법도를 벗어나 잘못 사용하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심지어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과도하게 억제하면서 경건을 추구하는 것을 이단의 특징으로 들기도 한다.

 

성육신과 몸의 부활이 보여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 그리고 몸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들은 몸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자신이 몸을 입는다는 것은 육체를 천하게 보는 그리스 철학이나 다른 종교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육체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고, 몸으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 하나님이 한계 많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초대 교회 이래 모든 이단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물론 성경은 인간 육체가 갖는 한계와 그로 인한 고통과 위험을 간과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이전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으로의 변화였다. 새로운 몸의 실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전부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몸이 어느 선에서 시공의 제약을 받을 것인지, 질병과 고통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울지 알 수 없다. 배고픔을 느낄지, 피로를 느낄지, 성적 욕구를 느낄지도 알 수 없다. 몸이 가진 기능을 다 가지면서도 그 한계를 다 뛰어넘는 존재를 생각하려니 내 머리 속에서는 모두 정리가 되지 않는다.

 

새 영혼과 옛 몸의 불일치 속에서
우리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는 것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통치를 향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영혼의 존재 지점과 지향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일상의 희노애락은 결국 우리 몸이 가진 한계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친다. 그럴 때마다 연약하고 한계 많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성취한 새로운 몸 덧입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면 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이 되지만, 몸의 새로워짐은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영원히 취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새 영혼과 옛 몸의 사이에서 우리의 소망이 커지는 만큼 그 불일치는 더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울 거야
가끔 인생에서 힘이 들 때, 주님의 재림 이후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상상한다. 고통과 눈물이 없는 곳, 걱정과 근심이 없는 곳, 질병과 쇠약이 없는 곳, 미움과 시기와 다툼도 없고 분쟁과 갈등이 없는 곳, 불평등과 차별이 없는 곳, 참 사랑과 영원한 안식이 있는 ‘그 곳, 그 시간’을 사모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을 이겨낼 힘을 얻곤 한다.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우리의 거듭난 영혼이 온전한 새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에 가끔 이 땅에서 옛 몸을 입고 살아갈 때를 돌아볼 때도 있지 않을까? 그때 우리가 옛 몸의 한계 가운데서 느꼈던 고통과 한계, 지었던 죄들을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온전하고 새로운 몸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옛 몸의 한계 가운데 괴로워하며 발버둥 치던 때가 그리워질 때도 있지 않을까? 그때가 좋았다거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그때는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추억할 것 같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온전한 은혜야말로 귀하고 감사할 것이다. 그곳에서라면 불완전하고 긴장이 많았던 시간들, 옛 몸의 한계 때문에 모두 엇박자가 되고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 받은 은혜가 더 크고 더 감사했노라 생각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