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병오 칼럼

하고 싶은 일, 주어진 일(2016.4)

정병오 칼럼

하고 싶은 일, 주어진 일

10년 전쯤인 것 같다. 한국성서유니온 초대 총무로 15년(1972~1986)을 일했고 한국 교회 성경묵상 훈련의 토대를 닦은 윤종하 총무가 소천 했다. 그가 장로로 섬기던 광야교회 주최로 조촐한 추모예배가 열렸는데 그 때 손봉호 교수의 조사 가운데 한 구절이 지금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저는 단호하지가 못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제게 주어진 일을 하고 살았지만, 윤 선배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윤 선배님이 부럽습니다.” 


위대한 성경 교사 윤종하와 그 영향력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고 윤종하 총무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목회자가 되려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신학대학원 진학이 좌절되었다. 이후 다른 일을 하면서도 성경공부와 신학공부를 꾸준히 하다가, 30대 중반에 성서유니온 한국 지부가 설립될 때 초대 총무로 부름을 받았다. 

당시 한국 교회는 부흥회 중심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기도에 대한 뜨거움은 있었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법을 잘 몰랐다. 종교적 열심을 넘어 일상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신앙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QT가 보편적이지만, 처음 ‘매일성경’이 발행되었던 1973년에 QT는 그야말로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성경’ QT잡지를 들고 전국 서점과 교회, 선교단체를 돌았다. 책을 보급하고 QT의 중요성과 그 방법론을 강의하고 훈련시켰다. 그는 평신도 성경 교사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같이 했다.

그의 QT와 성경 강의는 탁월했다. 강의를 듣는 성도에게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학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윤종하 총무의 영향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받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당시 윤종하 총무를 통해 말씀 보는 눈을 뜬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로 더 많은 사람들은 삶의 영역에서 말씀을 적용하고 누리며 또 연구하고 가르치는 삶을 살고 있다.

50대 초반 그의 성경 가르침 가운데 십일조, 주일 개념 등이 기존 교회의 가르침과 달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그는 한국성서유니온에 누가 될 수 없다며 총무 직을 사임했다. 이후 성경을 권별로 가르치는 ‘에스라성경연구원’(현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이 생겼을 때 4년 정도 원장으로 봉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직함 없는 평신도 성경 교사로 살았다. 국내는 물론 해외 교포 교회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2007년 2월 73세의 나이로 소천 했다.  

손봉호 교수가 그의 삶을 가리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던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욕망을 따라 살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일평생 성경연구의 결론이었던 철저한 ‘자기부인’의 삶을 살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다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는 한국성서유니온의 기초를 쌓는데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이 성서유니온에 약간이라도 누가 될 상황이 발생하자 미련 없이 총무 직을 버렸다. 성경을 권별로 가르치는 성경대학의 필요성을 주창했고 학교가 세워지자 그 토대를 마련하는데 ‘원장’ 직함으로 봉사했지만, 학교의 기초가 잡히자 모든 만류를 물리치고 바로 떠났다. 심지어 책을 내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그의 지식에 비해 책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서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이후 내가 한국교회사를 쓴다면 윤종하 총무를 꼭 제일 중요한 인물로 기술하고 싶다.


시대와 이웃의 필요에 반응하는 삶

손봉호 교수는 윤종하 총무의 고향 교회 후배이자 교회 대학부 후배이기도 하다. (손 교수는 윤 총무의 부친 윤봉기 목사가 목회했던 경주교회와 서울중앙교회에 출석했다.) 

손 교수 자신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주로 하며 살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한국 기독교 지성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평신도 설교자로서 교회 갱신과 분립 개척 운동을 이끌었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으로 기독교 시민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이 가운데서도 그의 본직인 교수로서 연구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었다.

손 교수 표현의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에게 모든 여건이 허락된다면 좀더 집중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을 것이다. 손 교수의 의도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제자 입장에서도 여러 활동을 줄이고 연구에 집중해서 시대의 빛을 비추는 사상이나 저술을 남겨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하게 된다. 본인은 더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필요한 분야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책임 있는 자세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시대적 필요와 요청에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고 책임지려고 했던 것 같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끊임없이 설교를 하고 글을 쓰고 여러 회의에 참여하며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시대의 변혁을 위해 운동 하고 단체를 꾸미는 많은 후배와 제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손 교수를 모시고 싶어 한다. 손 교수같이 진심으로 운동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거나 부당한 간섭을 하지 않는 분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두 방식

요즘 들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과 ‘주어진 일을 하는 삶’의 경계가 어디일까 생각이 든다. 아니 이 두 삶이 과연 다르기는 한 것일까? 윤종하 총무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단순한 삶을 살았다면, 손봉호 교수 역시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었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미뤄두고 시대와 이웃의 필요와 요청에 반응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과 ‘주어진 일을 하는 삶’을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살기에 더욱 힘쓰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손봉호 교수가 윤종하 총무의 삶이 부럽다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단지 돌아가신 선배를 높이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그 분의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더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다르다. 그래서 본인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부러움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 손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억누르고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오신 교수님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무척 귀한 삶입니다.’ 외쳤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반응해왔던 삶의 방식은 손 교수에 좀더 가깝다. 그래서 10년 전에 들은 그 말이 여전히 나의 마음을 짠하게 만드나보다. 동시에 그 말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삶의 방식’에 대해 자유함과 자신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