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병오 칼럼

기술사회, 민주주의, 영성(2016.3)

정병오 칼럼

기술사회, 민주주의, 영성

최근 핸드폰을 바꿨다. 7~8년 정도 썼던 2G폰의 액정 화면이 잘 보이지가 않아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어 고민 끝에 우체국 알뜰 폰으로 바꿨더니 요금이 1/2 이하로 내려갔다. 그동안 거센 스마트폰의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하던 2G폰이 더 이상 생산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결국 3G폰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정들었던 019 번호도 010으로 바꾸게 되었다.

 

나도 나름 early adopter
나는 기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당연히 자동차든 핸드폰이든 새로운 기계에 대한 욕망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핸드폰과 관련해서는 비교적 early adopter의 길을 걸어왔다. 우선 개인 휴대 전화기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삐삐가 1990년대 초에 처음 나왔을 때 초기에 구입을 했다. 그즈음 기독교사운동에 눈을 떠 몇몇 기독교사들과 전국의 기독교사들을 깨우고 조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늘 고심하고 사람을 만나던 시절이라 삐삐는 이러한 운동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개인 전화기인 PCS 폰이 막 보급되었던 1998년 초 PCS 폰을 구입했다. 당시 1998년 여름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한 명의 상근자도 없이 몇몇 교사들이 천여 명의 기독교사들이 모이는 집회를, 학교 근무하면서 준비하던 중이라 PCS 폰은 사무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 학교에서 내가 제일 처음 PCS 폰을 구입해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다.

 

일단 멈추기로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핸드폰이 보편화되면서 기능과 디자인 면에서 고급화 경쟁이 시작되었다. 핸드폰과 관련된 기술이 실용의 차원을 넘어 과도하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핸드폰이 사람과 사람을 보다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사람을 개별화시키고 비인격화시키는 부작용을 더 많이 낳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거부감이 더 커졌다. 그렇지만 핸드폰의 보편화 추세를 홀로 거스를 수는 없었다. 유행이나 첨단 기능에 뒤졌다고 해서 멀쩡한 핸드폰을 교체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정하고, 부득이 핸드폰을 교체할 때도 최소한의 기능과 최소한의 비용을 지출하는 정도에서 소극적인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핸드폰의 고급화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기술, 과소비라고 생각하던 나는 스마트폰의 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난감했다. 기술의 혁신이라는 면에서 스마트폰이 혁신 중의 혁신이라는 것은 분명했고, 이후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마트 폰 기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고통이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응답 차원이 아니라 기술 자체의 발전 논리와 상업화, 자본의 논리가 앞서서 인류가 그 전에 느끼지 못했던 필요를 창출한 결과라는 것도 분명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한 기술이 인류의 삶을 끌어가는 것이 과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고 풍요롭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짧은 소견이지만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스마트폰 기술 앞에서 멈추기로 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그 결과 혼자 카톡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변에 많은 민폐를 끼치기도 하고, SNS 소통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해 젊은 사람들과 적극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컴퓨터로 페이스북을 하고 밴드를 하는 등 나름 몸부림을 치면서 스마트폰을 사지 않고 최대한 버텨왔다. 그러다 최근 3G폰으로 교체해야 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단지 나이든 세대의 기술부적응인가?
스마트폰에 대한 나의 이러한 저항은 기술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이든 꼰대의 자기변명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스마트폰보다 더 혁명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전화, 텔레비전,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등도 내가 10대 혹은 20대에 경험했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러한 기술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윗세대들을 늙었다고 비웃지 않았는가?
그리고 기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지 않은가? 그 기술을 선한 사람들이 선하게 활용하면 얼마든지 자신과 이웃에게 선을 끼칠 수 있고, 악한 사람이 악하게 활용하면 자신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기술 자체의 진보를 가로막고 고민하는 그 시간에 이미 개발된 기술의 선한 활용과 부작용 방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기술사회의 도전, 어쩌라고?
이런 반론들이 틀린 말이 아니고 또 이러한 노력 외에 딱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술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현대기술’은 그 이전의 ‘전통적 기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철학자들의 지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대기술’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 자체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 시스템 가운데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는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 시스템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해서 모두가 다 알지만 그 누구도 이를 멈추거나 통제할 수가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기술사회 혹은 위험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을뿐더러 혹 설명을 듣더라도 대부분 “알겠는데, 어쩌라고?”라고 식으로 반응을 한다. 현대 인간을 편리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기술문명을 거부하고 17세기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인생의 참 의미를 묻는 아미쉬 공동체나 브루더호프 공동체처럼 살란 말이냐고 묻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을 단지 비현실적인 특이한 사람들이나 이상주의자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꽉 죄고 있는 기술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대안 교과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천천히, 성찰해가면서
보다 현실적으로 나는 기술의 발전을 조금 더 천천히 따라가길 제안해 본다. 기질적인 early adopter야 열심히 앞선 기술을 따라가지만 그 외 사람들은 혹시 내가 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면 뭔가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버리고 조금 더 기술을 숙고하면서 따라가면 좋겠다. 아무리 기업이 상업적 논리로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나가더라도 소비자들은 기업의 속도에 허겁지겁 맞추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명암에 대해 좀더 숙고하고 논의하면서 좀더 느리게 기술을 따라가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 나아가 기술 발전의 속도와 내용을 기술자들과 기업가의 손에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이 우리 사회와 미래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공론의 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합의해가는 과정을 거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기술은 중립적이라는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영적인 영향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교회 차원에서 이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바람직한 활용 방안에 대해서 함께 논의하고 실천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개인이나 교회 차원에서 실제적인 영적인 훈련이 될 것이고, 기술사회와 위험사회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우리 사회 가운데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