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병오 칼럼

배움의 욕구와 자발성에 근거한 공부(2016.1)

정병오 칼럼

배움의 욕구와 자발성에 근거한 공부

 

 

 

얼마 전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존 볼트 교수가 축약한 <개혁파 교의학>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구입을 했다. 축약을 했다고는 하지만 한글 번역판 기준으로 1,412쪽이나 되고 가격도 70,000원이나 되는 그것도 전문 신학책을 내가 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뿐 아니라 그 전 2011년에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전문이 번역본이 나왔을 때도 주저함 없이 구입을 했다. 이 책은 한글번역판 기준으로 권당 850~900쪽 분량의 4권의 책이니, 색인까지 합해 총 3,616쪽 분량이다.(구입 당시 의욕을 가지고 이 책에 달려들었으나 1권 절반 정도 읽다가 실력부족 반 시간부족 반으로 접은 이후로 아직 손을 못대고 있다.)

 

대학 시절, 동아리 회보를 만들던 기억

이렇게 굳이 전문 신학자의 방대한 분량의 책에 애착을 가지고 도전하는 이유는 대학교 2학년 때 헤르만 바빙크와 맺은 인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내가 활동했던 기독동아리는 <개혁신앙>이라는 이름의 주간회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이었기에 당시 주간회보는 모든 모임의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자 교육 수단, 운동의 수단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규모 이상의 기독동아리나 교회 대학 청년부들은 다 주간회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간회보를 인편이나 우편으로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공유하고 시대적인 흐름을 공유하곤 했었다.

이러한 많은 주간회보들 가운데 우리 대학 동아리가 발행했던 <개혁신앙>은 비교적 유명한 회보에 속했다. 비록 A4 용지 8면 내지 12면 정도의 분량에 불과했지만 시대와 세상을 읽는 사설, 기획 연재 글, 강의나 설교 녹취 글, 삶 나눔 글, 시적인 단상 등 다양한 내용들이 담겼다. 학생들이 학업을 감당하는 가운데 이러한 글을 채울 뿐 아니라 편집 기획부터 청탁, 원고을 받아 손글씨로 편집, 인쇄소에 맡기고 찾아와 배달(동아리에 소속돼 있지만 잘 나오지 않는 회원들에게는 과사무실로 배달을 했다)과 외부 우편발송 작업까지 했으니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감당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 <개혁신앙>은 외부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우표값을 보내면서 발송 요청을 하는 분도 꽤 있었고 신학교 도서관 등에도 배달이 되었다.

당시 1학년 신입생이 들어오면 수습기자를 뽑아 손글씨 편집, 인쇄소 업무, 배달 및 발송 업무 등을 감당하면서 업무를 익히게 했고, 이 과정을 거친 학생들이 2학년이 되면 기자를 맡아 편집기획과 청탁 등 주요 실무를 맡게 했다. 그리고 3, 4학년들은 편집장, 사설 위원 등을 맡았다. 그래서 이 과정만 잘 거쳐도 기획이나 글쓰기, 문서운동과 관련되어 어느 수준 이상으로 훈련이 되었다.

 

대학 2학년생, 신학의 거장을 논하다

내가 2학년 기자를 할 때였다. 그때 편집회의에서 연중기획를 구상하면서 각 학문 영역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개혁주의 교회관에서 본 한국교회”, “개혁주의 신학자 탐구등의 주제를 다루기로 했다. 각 영역별로 나도 몇 개의 주제를 맡아 글을 썼는데, 아직 학문적인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대학 2학년생이 생소한 주제를 맡아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개혁주의 교회관에서 본 한국교회영역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라는 글과 개혁주의 신학자 탐구영역에서 헤르만 바빙크를 맡았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관련된 주제는 자료들이 많이 있었고 또 실제로 피부로 느끼고 경험하는 영역이라 상당히 어렵지가 않았는데, ‘헤르만 바빙크는 나로서는 생소한 영역이었고, 관련 자료도 많지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나마 몇 권 없던 한글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빙크가 평신도들을 위해 쓴 <하나님의 큰일>, 코넬리우스 야스마의 <헤르만 바빙크의 기독교 교육철학>, 차영배 교수가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가운데 일부를 편역한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의 원리> 등이 내가 참고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이렇게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가운데 아주 기초적이거나 극히 일부분을 다룬 자료들을 가지고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사상을 다룬 글을 써서 게재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썼던 나로서는 제한된 자료이긴 하지만 여러 차례 읽고 정리를 하는 가운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사상이 갖는 매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헤르만 바빙크 신학 사상의 본체가 소개되길 간절히 소망했고,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핵심 저작들의 번역본을 접하며 묘한 감격과 흥분을 경험하고 있다.

 

가르침에서 배움으로, 어떻게?

얼마 전부터 우리 교육계도 교사가 얼마나 잘 가르쳤느냐?”가 아니라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있느냐?”가 더 중요함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암기를 하더라도 시험을 본 후에는 다 잊어버리거나 삶의 뒤켠으로 제쳐두는 공부가 아닌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그 배운 내용을 자신의 삶의 자산과 실천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직 초기부터 토론 수업이나 프로젝트 수업, 논술 평가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러다가 2014년 문래중학교에서 중1 자유학기제를 할 때 선택 교과로 소논문 쓰기과목을 개설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책의 저자가 되라고 하면 책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모르고 책을 읽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주제에 대해 자료를 찾고 현장을 방문해 보고 생각해 보고 글을 작성하는 과정이야 말로 매우 좋은 진로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물론 현실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일단 우선적으로 학생 배정부터 관심을 따른 선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방적인 배정이 많았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한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그리고 중1 상황에서 논문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글쓰기나 논리적 사고 훈련이 안 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욕심은 내려놓고 어떤 아이는 주제를 잡는 수준까지, 또 다른 아이는 그 주제에 맞는 기초 자료를 찾거나 설문 문항을 작성하는 수준까지, 그리고 이 과정을 제대로 따라올 수 있는 아이들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자기만의 논문을 작성하도록 이끌어주었다.

 

스스로 배우는 것의 힘

2015년 고등학교 1학년을 위한 민관협력형 대안학교인 오디세이학교아이들에게도 논문쓰기과목을 개설했다. 많은 아이들이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과목을 선택한 친구들은 이전 중1 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그래도 논문의 틀에 맞게 자료를 찾고 글을 구성하면서 그 주제에 대한 전문지식과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논문쓰기외에도 오디세이 교육과정에는 아이들이 관심 주제에 따라 모여서 1년 동안 그 주제를 탐구하고 실천 과제를 잡아 실행해보는 제대로 된 프로젝트 수업들이 몇 개가 있다. 이러한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넓히고, 스스로 어떤 일을 기획하고 탐구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키워가며, 삶에 대한 자신감과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높여가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배움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힘써야 할 것

아이든 어른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움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어주신 가장 근원적인 본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에게 이러한 배움의 욕구를 잘 이끌어 내주고 인도해줄 때 아이는 배움의 기쁨을 맛 보아 알고, 그 맛은 아이로 하여금 더 풍성한 배움으로 이끌어준다. 여기에서 참된 성장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는 원래 힘든 것이다.” “공부를 좋아서 하는 사람이 누구 있냐?”라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왜곡된 믿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비록 타락하고 왜곡된 우리 현실 가운데서 배움에 대한 흥미와 무관하게 오직 평가받기 위한 암기 반복학습을 해야 하고 또 강요해야 하는 현실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가운데서라도 이 현실에 맞추어 배움의 본질을 전도하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또 교사 스스로도 배움의 욕구에 기반을 둔 참된 배움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