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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거룩한 사치(2015.10)

정병오 칼럼

거룩한 사치

 

내가 하고 싶은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면?

쓸데없는 상상인줄 잘 알면서도 지금 내게 모든 생계의 부담과 사회적 책임의 짐이 없어지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늘 1순위로 떠오르는 생각은 성경공부를 마음껏 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공부란 본문을 놓고 원어를 포함한 여러 다른 번역본도 찾아보고, 성경 사전이나 성경지도 등을 활용해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어야 하겠지만, 그를 위한 기초 지식이 부족하고 열정도 부족한 나로서는 이런 작업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이다. 이보다는 성경본문과 그 배경을 깊이 연구해 성경 본문의 깊은 의미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연구서들을 폭넓게 읽으며 거기에 빠지는 일이다.

이러한 꿈이 공상이 아닌 현실에 기반한 꿈이라는 것은 평소 나의 독서 습관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바빠도 출퇴근을 포함한 이동 시간 1시간은 매일 독서시간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가끔 일찍 퇴근하는 날은 1~2시간 더 독서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황금 같은 독서시간에 읽는 책의 60~70%가 성경 본문 연구서들이다. 그리고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쌓아두는 책을 포함해서 내가 구입하는 책의 비율도 비슷하다.

 

평신도가 성경을 연구해 뭐 할 거야?

그래서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목회를 할 거냐고 묻는다. 하지만 성경 본문 연구를 좋아하는 것과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것 사이에는 몇 단계의 비약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내가 틈틈이 읽은 성경 본문 연구서들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내가 묵상한 본문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기독교사들의 모임에서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할 때 기쁨이 있다. 하지만 이럴 때도 내가 전하는 말씀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신학자들의 본문 연구에 기반한 것이고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본문의 문맥을 살피고 현실에 적용한 것이긴 하지만 성경 원어 등 또 다른 성경 연구의 중요한 부분이 빠진 한계가 있는 설교임을 분명히 밝힌다. 물론 그러기 때문에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와 설교와 전념하면 이런 부분들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이 길이 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이 없고,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교사로서의 소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다른 질문이 들어온다. “만약 목회가 당신의 부르심이 아니고, 교사와 교육운동가가 당신의 주된 부르심이라면 당신의 시간 가운데 성경 본문 연구와 관련된 독서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과한 것 아니냐?” “당신의 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교육이나 교과와 관련된 일에 더 쏟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이 성경 본문 연구서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소명의 분산이고,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사치가 아닌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가끔 스스로에게도 던져보는 질문이다. 하지만 나를 살펴볼 때 나는 학교에서 정규 근무 시간 뿐 아니라 근무 시간 밖의 많은 시간을 포함해 내 삶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과 관련된 일에 온통 시간과 에너지를 다 투자한다. 내가 마음이 끌리는 성경 본문 연구에 쏟는 시간들은 그야말로 짜투리 중의 짜투리 시간일 뿐이다. 내 삶의 전체 시간 비율로 보더라도 나는 다만 최소한의 여가 시간을 성경 본문 연구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도 가급적 절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적 유희, 그래도 의미가 있다면?

성경 본문 연구 신학 서적들을 읽기를 좋아하는 것이 비록 내 삶에서 시간적으로 많은 시간이나 중요한 시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해도 이 일이 내 삶의 영적 실천이나 성화의 분투와 관련해 얼마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일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내가 성경 본문 연구 신학 서적을 읽는 시간에 기도를 더 할 수도 있고 또 성경 읽기나 암송을 할 수도 있으며, 묵상이나 전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본문 연구 신학 서적을 읽는 일이 영적 혹은 지적 유희가 되고, 내 마음과 귀를 높이는 교만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성경 본문 연구 신학 서적들을 읽는 것을 영적 사치가 아닌 거룩한 사치로 부르면서 지속하는 이유는 이런 독서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성경의 본문을 현재의 관점에서 문자로만 읽고 모든 내용을 은혜의 수단으로만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 본문을 처음 받았던 사람들의 삶과 그 시대로 나를 데려가 준다. 그래서 그 처음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의 삶의 한 가운데 서서 그들이 그 말씀에 다양한 형태로 반응했던 그 반응들 속으로 들어가 나도 그들처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이러한 상상들은 많은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대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생의 본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다양한 차원에서 생각하게 해 준다. 이렇게 성경의 본문 속에 깊게 들어가 인생과 세상을 들여다보고 공감해보는 경험들은 나를 제대로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교육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은혜

이렇게 성경 본문 연구 신학 서적들 읽기가 내 삶에 주는 유익이 크고 거기에 빠졌을 때의 기쁨이 크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책을 조금 읽다가 덮어야 하는 상황이 늘 감질나다. 그래서 며칠이든 몇 달이든 여기에만 푹 빠지고 싶은 생각을 자주 하나 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결코 악하지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생각이지만 하나님이 내가 이 일에 지금 이상의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많은 문제와 모순 덩어리 속에서 뒤엉키고 신음해야 하는 학교라는 직업 현장 가운데서 이상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살아내는데 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교육 고통의 현실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내 힘이 닿는 지극히 작은 부분을 붙들고 더 열심히 싸우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의 경우는 성경 본문과 씨름하고 그 연구 성과들을 누리는 것보다는 아이들과 씨름과 한국 교육의 모순과 씨름하는 것이 더 거룩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성경 본문 연구 신학 서적들을 읽고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은 지금 내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양념으로 존재할 때 오히려 더 하나님 나라의 맛을 제대로 내는데 기여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그 말씀이 다 수긍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큰 지혜와 경륜 안에서 생각할 때 이 말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주어진 한계 가운데서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삶에서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면 무엇을 할 텐데라는 생각은 참 부질없는 생각이다. 다만 지금 주어진 상황의 한계 가운데서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상황이 도무지 되지 않아 시드는 것도 많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서 무언가 틈이 생기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지금 내가 많이 갈급해하는 성경 본문 연구만 해도 대학 시절과 결혼 후 아이가 생기기 전 시간까지 헬라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영어를 좀 더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다만 내가 그 기회를 흘러보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내게 주어진 삶의 한계 가운데서 내 속에 성경 본문의 깊이에 더 들어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아주 작은 시간이라도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이를 최대한 누리려고 한다. 다만 갈수록 그 좋던 시력이 조금 떨어지면서 점점 눈이 침침해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