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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성경, 역사, 교육(2015.12)

정병오 칼럼

성경, 역사, 교육

 

왜 번역의 틀을 활용하셨을까?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여러 개의 번역본을 펼쳐놓고 읽는 것을 좋아한다.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하되,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을 대조해서 읽다 보면 개역개정만 볼 때는 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보이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풍성함에 조금 더 다가서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리고 한글 번역들만 대조해서는 메시지가 정확히 잡히지 않을 때는 부족한 영어지만 영어 번역본을 대조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배우지 않은 것을 한탄하게 된다.

생각이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 미치게 되면 이와 관련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정확무오한 말씀을 전해주고자 했다면 각 나라 백성에게 각 나라 언어로 된 말씀을 주시지, 왜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된 말씀만을 주셨을까?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번역은 본질적으로 원문의 뜻을 정확히 다 담아낼 수가 없고 부분적인 오역이나 부정확한 표현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모르셨을까?

번역의 불완전성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하나님이 맨 처음 주셨던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원본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인류가 갖고 있는 원어 성경은 모두 사본이고, 그 사본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약간씩 다른 표현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기독교에서 성경이 갖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성경 원본은 보존시켜주셨어야 혼란이 없었을 텐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경의 원본이 없다니?

번역이니 사본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은 차치하고 그냥 주어진 한글 성경이라도 열심히만 보자는 마음으로 말씀을 보다 보면 성경이 한 사람에 의해 체계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성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 여러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쓰여졌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부분은 같은 내용이 다른 관점에서 쓰여졌고, 어떤 표현들은 미묘하게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직접 두 돌판에 새겨주셨다는 십계명의 내용도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셨던 주기도문의 내용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문구가 차이가 난다. 십계명이나 주기도문뿐 아니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의 역사와 역대서의 기록이나 관점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이 4복음서인데, 4복음서는 관점이나 내용 구성이 다를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사실 관계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곳도 있다.

 

신학은 해결자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이 등장했다. 신학은 여러 성경의 사본 가운데 어느 사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울지를 연구하기도 했고, 같은 내용을 여러 관점에서 다루었거나 얼핏 보기에 일치시키기 힘든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조화할지에 대한 많은 연구들을 진척시켰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문학적 장르와 다른 저자들의 내용을 나름의 체계를 잡아 신론’, ‘기독론’, ‘교회론’, ‘성령론등의 틀로 정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대한 신학적 체계를 일반 성도들에게 잘 이해시키고 교육시키기 위해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잘 정리된 틀로 성경 내용을 체계화한다 해도 성경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다 담아낼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이를 정리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다른 해석과 신학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해석과 신학의 차이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다. 성경 자체가 갖는 여러 형태의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 정확성을 넘어 총제적 정확성으로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잘 정리되고 체계화된 조직신학의 형태로 성경을 주시지 않고, 사람들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삶의 이야기 형태로, 어쩌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감정이 표출된 시와 노래와 기도의 형태로, 시대의 불의를 향한 외침과 저주, 축복의 글로,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묵시의 형태로 주셨을까? 아마 이 성경을 받는 인간의 삶이 수많은 일상과 다양한 감정,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현실을 넘은 꿈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해석이 필요없는 한 가지 계명으로 모든 인간을 획일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의 삶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다가가시며, 인간이 가진 복잡다단한 삶과 감정의 상황에 일일이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정교하고 정확한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한다 해도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하나님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 표현하지 못하면서 어떤 식이든 부분적으로 표현했을 경우 그 정확성은 또 다른 오류나 왜곡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특정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 만난 하나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자신의 한계 내에서 표현한 경외감과 사랑의 표현 등이 어쩌면 더 정확에 가까운 표현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분노하시고, 후회하시고, 인내하시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으시는, 도무지 어떤 한 문장으로 일관되게 표현할 수 없는 모습들이 인격적이 자유로운 하나님에 더 맞는 표현이지 않을까?

 

잘 모르지만 상상해 본다면

그리고 하나님은 왜 다양한 언어를 가진 종족들에게 정확한 번역본을 주시지 않고, 한계가 많은 번역의 틀을 통과하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히브리어, 헬라어 원본을 보존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사본만 남겨놓으셨을까? 그냥 상상만 해 보기로는 정확한 번역본이나 원본이 있으면 인간들이 그 말씀에 더 잘 순종하기보다는 그것을 종교의 칼로 삼아 휘두르는데 더 많이 사용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차라리 약간의 오류 가능성이 있는 번역본과 사본들을 붙들고 원뜻과 그것을 주신 주님의 뜻을 묻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하신 것은 아닐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확한 번역본이 없고 원본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며, 더 많은 생각을 하며, 더 신중해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같은 원리로 성경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신학이 다양한 해석을 가져오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양한 해석이 도를 넘어 이단을 만드는 등 수많은 폐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신학적 다양성을 허용하신 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생각할 때 그래도 이러한 다양성이 인간의 오류를 막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하신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들이 서로의 비판을 통해 발전해가는 것이 성경 말씀의 원뜻과 그 풍성함을 드러내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하신 것은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할진대 우리의 교육이 어떠해야 할지는 더 명확해 보인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지금까지 자연과 사회를 관찰하면서 정리해놓은 지식의 핵심이라고 할 때 이러한 지식은 잠정적 지식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보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내용일 뿐 그 내용은 새로운 발견에 의해 언제든지 바뀔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할진대 우리는 최대한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지식을 가르치되 이것이 잠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해야 하고 이와는 다른 소수의 관점도 소개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다양한 관점을 접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식들에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실천하도록 훈련해가야 한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비교육적인 현실을 권력을 힘으로 잠시 밀어붙일 수는 있으나 결코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가 과연 보편적인 진리와 교육의 본질에 얼마나 제대로 서 있는지를 돌아보며, 이에 근거한 개인적 공동체적 싸움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