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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2016.7)

정병오 칼럼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떤 잡지든 표지를 보면 잡지의 ‘제호’가 있고, ‘제호’를 꾸며주는 간단한 문구가 나온다. 예를 들어 월간 <샘터>에는 “내가 만드는 행복, 함께 나누는 기쁨”이라는 말이, 월간 <좋은생각>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말이 제호 바로 위나 옆에 붙어있다. 그러니까 이 꾸미는 말은 잡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 문구는 잡지의 생명과 함께 지속되기도 하지만 잡지의 편집 방향이나 추구하는 철학이 변하면 함께 변하기도 한다.


단 한 호만에 사라진 구호

그렇다면 월간 <좋은교사>의 제호 옆에는 어떤 말이 붙어있을까? 당장 표지를 들춰보면 알 수 있겠지만, “교육을 새롭게 하는 힘”이다. 거의 10년 이상 <좋은교사> 잡지와 함께 한 말이다. 처음부터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아니다. 맨 처음 창간되었을 때는 “좋은 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다가 이 말에서 지금의 문구로 넘어가기 직전, 딱 한 호에 다른 말이 사용된 적이 있다. 

그게 언제인지, 또 그 말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퀴즈를 내고 싶다. 

사실 나도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그 말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고단한 교직생활의 벗”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적힌 잡지가 나가고 독자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늘 똑같은 잡지의 제호이기에 무심히 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호 옆의 꾸미는 말을 유심히 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람들이 항의를 한 이유는 다양했다. 교직생활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즐거운데 왜 고단하다고 왜곡하느냐는 취지의 항의도 있었을까?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아도 교직생활이 힘들고 고달픈데, <좋은교사>마저 교직의 ‘고단함’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뭐 있냐는 말이었다. 

교직은 삭막해져가고 교육적 의미와 보람은 점점 사라지고 육체적 정신적 고달픔이 더해 가는 것과 반비례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교직의 직업적 안정성을 부러워하고 학생들의 직업 선호도는 올라가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사는 자신이 느끼는 고달픔이 분명히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지 못하고 내면으로 끙끙거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교사>만이라도 교사들의 마음을 읽고 이를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주며 희망을 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데, ‘고달픔’을 부각시켜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호소였다.


나 외롭지 않네, 정말?

인생의 여러 문제로 힘들고 어려울 때 ‘힘들다, 힘들다’ 외친다고 이 힘듦이 해소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특히 비슷한 상황에 있는 주변 사람이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살 땐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더 빠진다. 

그래서 일까? 사람들은 힘들수록 ‘힘들지 않다’고 외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나만해도 대학 1학년 때 일종의 향수병 증세로 말할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나 외롭지 않네 나 두렵지 않네 주님 나와 늘 계시네” 찬양을 목이 터지라고 불러댔었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의 문제로 무겁고 힘들 때는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라는 찬양을 자주 불렀었다. 주님이 함께 계셔서 외롭지 않다는 외침은 나의 외로움이 크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었고, 주님 십자가 그늘에서 쉼을 얻고 있다는 고백은 그만큼 죄의 문제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무슨 의미가 있지?

작년 후반부터 지금까지도, 남녀노소에게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노래가 많이 불리고 있다. 이 노래가 유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고, 사회 구성원들의 걱정과 염려, 아픔이 커져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온 국민이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노래 부르며 위로를 받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 사회가 절박하다.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노래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다. 우리가 왜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 현재 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걱정’이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고 말할 뿐, ‘그런 의미’가 어떤 내용인지 말하지 않는다. 

이 질문은 사실 이 노래 뿐 아니라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제대로 답을 못하는 부분이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걱정과 무의미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감이라도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면서 날마다 부딪히는 수많은 ‘걱정과 고민’,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고달픔’, 아무리 묻고 되물어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 어떤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물론 그리스도인은 알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시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다 그분의 섭리에 있음을. 우리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고통과 고달픔, 우리의 실수와 허물, 심지어 죄악까지도 그분의 크신 팔 아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그리고 우리 삶에서 세세하게 말씀 적용의 방식으로, 기도 응답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고 고통을 제거해 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니 이런 일은 가끔 있을 뿐이다. 영적 차원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한줄기 빛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현실의 무게는 여전히 남을 때가 많다. 때로는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고통과 무의미의 풍랑이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덮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시로 무시로 기도하며 모든 삶을 가지고 기도로 나아가 그분의 뜻을 구하지만, 때로는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노래하며 위로를 받는지도 모른다.


이 역설 앞에 겸손히

하나님이 이 땅을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통을 다 없애주시고 삶의 고달픔을 다 없애주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고통을 다 없애주지는 않더라도 이 고통의 의미를 다 밝혀 드러내 줄 수는 있지 않으신가?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품에 돌아오지 못한 당신의 다른 자녀들이 겪는 고통과 고달픔, 무의미에 공감하며 살라는 것이 아닐까? 그들과 공감하지 않고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나타내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거시적인 뜻과 보이지 않는 섭리를 드러내시고 일상에 나타나는 하늘의 능력과 신비를 약간씩이나마 맛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고통과 고달픔, 의미 없음의 안개를 헤쳐 가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역사함을 밝히 증거하도록 빛을 주시는 것 아닐까?

물론 이 두 가지 역설 가운데 균형을 잡고 살아내는 것은 더 힘들다. 내 고통과 내 삶의 고달픔도 감당하기 버겁고 내 삶의 의미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그들에게 이 모든 고통의 의미가 되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는 것은 낯 뜨겁고 때로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니 그러하기에 더 겸손히 인생의 무게 앞에, 이웃의 고통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 앞에 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