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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신학의 바다에서 넘나들며 배우기(2016.9)

정병오 칼럼


신학의 바다에서 넘나들며 배우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바다에 빠지기

대학 시절 수강했던 교과목들을 지금 떠올려보면 내용은 물론이고 과목명조차도 떠오르는 과목이 많지가 않다. 그때 들었던 교과목 내용이 시시했거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30년 가까이 흐르다 보니 내 삶의 일부분으로 완전히 소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30년이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과목명은 물론이고 내용까지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나는 과목이 몇 과목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이 과목들은 교수님의 강의가 탁월해서가 아니라 그 과목의 내용들이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내 삶의 관심이나 고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과목 중의 하나가 종교학과에 개설되었던 나학진 교수님의 <현대 기독교 사상>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하르낙, 그리고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분류되는 칼 바르트, 라인홀드 니버, 본 회퍼,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 희망의 신학으로 유명한 위르겐 몰트만, 나아가 현대 카톨릭 신학자의 거두인 칼 라너, 한스 큉에 이르기까지 12명의 현대 신학자 사상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과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강의는 소위 말하는 명강은 아니었다. 깊고 방대한 신학자들의 사상을 3시간에 1명씩 다루었으니 그야말로 겉핥기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데다가 교수님의 수업 방식도 낡은 대학노트에 정리된 내용을 읽는 방식으로 밋밋하게 진행되었다.

 

금기를 넘어, 내 손으로 확인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업이 지금껏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까닭은 당시 수업을 듣던 내 상황과 관계가 깊은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보수 중의 골보수라 불리는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성장했다. 성경의 무오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육체의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등 근본주의 신학에 뿌리를 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은 이러한 근본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설교나 교육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자유주의 신학자와 그들의 신학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았다. 핵심은 자유주의 신학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대속적 죽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부활과 심판도 문자 그대로가 아닌 그 의미와 윤리적 실천의 관점에서만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자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이러한 가르침을 굳게 믿었지만 대학 생활을 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믿어도 알고 믿고, 비판을 해도 제대로 알고 비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이 그 동안 내가 믿어왔던 보수적인 신앙을 흔들 수도 있겠지만 내가 믿는 것이 진리고 참이라면 이 진리가 나를 지킬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랬기에 수업을 듣는 내내 대표적인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 사상을 제대로 접해본다는 설렘과 혹 이로 인해 내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동시에 있었다.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무엇이 다른가?

이 수업을 통해, 그리고 이후 좀더 관심이 가는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을 더 읽어가면서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우선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부분에서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가 가장 크고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보수신학에서도 성경의 영감을 이해할 때 축자영감설이나 기계적 영감설이 아닌 유기적 영감설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가급적 성경에 나오는 표현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스펙트럼이 워낙 넓기 때문에 하나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성경의 문자적 표현보다는 그 표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편이다. 메시지의 파악을 위해 문학적 역사적 분석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격은 약화되고 인간이 쓴 하나의 문서의 성격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인간 타락과 죄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재림과 심판 그리고 영생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보수신학에서는 이 부분과 관련된 성경적 표현을 하나의 신학적 체계로 정리를 하긴 하지만 최대한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작업을 과도하게 하다 보니 영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는 사라지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체계적 이해, 윤리적 근거와 실천 지침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비교 분석은 경향을 말할 뿐이고 자유주의 신학 내에서도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

 

신학의 두 흐름, 강점과 약점 이해하기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접하다 보니 내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자랐던 보수신학의 강점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비해 학문성이나 상상력은 부족하지만 성경이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면에서는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강점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보수신학이 가진 약점과 자유주의 신학이 가진 강점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보수신학은 당당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보수신학이 가진 골격 위에 자유주의 신학에서 취할 수 있는 점을 취하면 보수신학이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신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 골격에 대한 분명한 확신 위에 서 있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다양한 신학적 작업과 성과들은 보수신학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보수신학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보수신학에 비해 자유주의 신학이 가진 제일 큰 강점은 이 세상과 역사, 인간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아닌가 한다. 보수신학은 구원론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구원받은 자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의 의미와 이 세상 전체와 역사의 의미, 그리고 불안으로 점철된 미래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연 믿음에 들어오지 않은 많은 사람과 이 세상은 단지 멸망이라는 한 단어로만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구하기 위한 노력조차 별로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 실존의 문제와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역사의 의미,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 기독교가 던져야 할 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을 끌어내고 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다양함과 풍성함 누리기

내가 읽고 조금이라고 공부한 한계 내에서 말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 가운데 신정통주의 신학은 보수신학과 접점이 많으면서도 동시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혀줄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하고 풍성한 보고다. 나의 경우 학부 시절 라인홀드 니버에 매료돼서 그의 윤리 사상을 주제로 학부 졸업 논문을 쓴 바 있다. 그리고 신도의 공동생활, 나를 따르라, 옥중서신같은 본 회퍼의 저작도 즐겨 읽었으며, 폴 틸리히의 설교집을 통해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또한 가톨릭 신학자들의 책도 좋아하는 편인데, 가톨릭 신학자들의 저작을 통해 영성 부분부터 다른 한편으로 사회참여 부분까지 개신교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는 부분의 통찰력을 얻곤 했다. 특히 한스 큉의 교회를 통해 교회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경험한 적이 있다.

개신교 보수신학 책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나아가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자유주의 신학이나 가톨릭 신학을 논하는 것이 사변적이고 과도한 오지랖을 발휘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하나님의 큰 품 안에서 좀더 넓게 보고 다양한 맛을 보는 것이 나에겐 나름 유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