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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진의 알사탕 6 : 가르침은 무술이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5. 4. 14:48

 권미진의 알사탕6
가르침은 무술이다

권 미 진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생각한다. 아이들은 절대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 하는데 나 혼자 ‘들이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더욱 그러하다. 교사 양성 과정에서 배운 수많은 이론들은 도대체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인지 한탄하는 때가 많다. 그래서 학교에서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기술적 기능을 많이 고안하게 된다.

가르침이 예술이 되면 좋겠지만 현장에서는 아직 기술 내지는 무술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봉술

 쉬는 시간. 중학교 복도에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이 헤매는 무리들이 즐비하다. 내가 지나갈 때 아이들은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뭐요’, ‘어쩌라고요’의 눈빛을 하고 복도에 기댄 방랑자들과 그 사이로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한량들이 있을 뿐이다.

 교사의 평균 신장과 포스는 아이들에게 밀린 지 오래다. 종 치고 복도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자주 느낀다. 무기화된 아이들의 육탄 공세를 막아 낼 방법은 결국 봉술 1단계. 기다란 봉으로 휘적휘적 앞을 저으며 내 앞길을 내가 예비하는 방법뿐이다.

 “야, 저리 좀 비켜 봐.”
 “선생님!”
 “왜.”
 “지휘봉이 샘 키보다 더 커요. 후훗!”
 “…….”

 같은 물건이 교실에서는 다르게 쓰인다. 칠판을 짚어 주거나, 화면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이지만 대개 잠자는 숲 속의 한량들을 깨우는 용도로 쓰인다. 봉술 2단계다. 학생들의 대속물이 된 교탁에는 곳곳에 희생의 아픔이 서려있다.

 무사 기질과 의협심이 강한 교사는 같은 물건을 공격용으로 쓴다. 무림의 평화와 원칙을 지키는 학생부 선생님들이 주로 이런 용도를 선호하신다. 전설에 따르면 하수는 각목 종류를, 중수는 원목을, 고수는 드럼 스틱을 쓴다고 한다. 봉술 3단계는 교육청마다 다른 전설이 전해진다고….

 “선생님!”
 “왜.”
 
“샘 요새도 쇠 파이프 써요?”
 
“……?”


취권

 잠에 취하여도 가르칠 건 가르친다. 이른바 취권. 각종 모임, 수업, 연수 등으로 교사들의 일상은 복잡하게 흐른다. 학교도 직장인지라 회식에 빠질 수도 없고, 내 개인 영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2차나 3차 회식도 가야 하고, 남의 아이 가르치느라 방치한 내 아이는 어린이집과 친정과 시댁에서 울며불며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대학원의 교수님은 현직 교사를 봐주는 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출석을 정확히 체크하신다. 내일 교육청에 보고해야 할 공문은 산더미인데 업무의 핵심에 속하는 수업은 하나도 준비되지 않았다. 넘쳐 나는 스케줄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교사는 곧 지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잠의 세계로 빠진다. 때는 새벽 2시.

다음날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선생님들의 얼굴에는 전날 미처 보충하지 못한 잠이 생수의 강이 터진 듯 얼굴에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신공인가. 미처 수업 연구할 시간이 분명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진행된다. 심지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무어라 대답을 한다. 내가 무슨 질문을 했지? 이것이 잠에 취해도 공무는 수행한다는 변형 취권.

 말로만 들어 본 전설의 ‘진짜 취권’을 쓰시는 분들도 계신다. 새벽까지 알코올에 가득 잠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바로 출근, 전혀 표시내지 않고(하지만 학생들은 이미 간파했고)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가르치는 엄청난 내공. 그들은 적의 공격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담대함마저 갖추고 있다.

 “선생님!”
 
“왜.”
 
“샘 어제 한잔 하셨어요?”
 
“…… 어쩌라고!”
 
“…….”

일타삼피

 교사의 한 마디에 최소 세 명의 학생이 걸려드는 언변 수련의 핵심. 수업을 한창 진행하다 보면 학생들끼리 수군거릴 때가 있다. 쪽지가 돌고 있거나, 한 녀석이 실없이 한 농담이 파도를 일으켜 ‘카더라 통신’이 돌고 있는 경우다. 그럴 때 교사는 조용히 시선을 낮추어 저음을 동반한 낚시를 준비해야 한다.

 “야, 거기.”

 이 한 마디에 최소 열다섯 명은 뜨끔해야 한다. 중저음을 지속한다.

 “너, 그거 뭐야.”

 여기에는 적어도 일곱 명은

 “저요?” 라고 되물어야 한다.

 “그래, 너 일어서 봐.”

 이때 세 명 정도는 일어서 줘야 그 중에 한 녀석이라도 주동자가 나오고 사건을 짚어 낼 수 있으리라. 그래야 한 옥타브 올려서 고함이라도 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경우도 발생한다.

 “띠리리리……♬”
 “야, 거기.”
 “…….”
 “휴대폰 가진 놈. 일어 서.”
 “…….”
 “안 일어서? 누구야?”
 “…….”
 “뭐야, 어떤 놈이야! 누가 수업 시간에 휴대폰 들고 있으래. 일어 서!”
 “샘 ! 건너편 초등학교 마침 종인데요.”
 “…….”
 “…….”
 “수업하자.”

 봄바람 가득한 교정.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새잎이 나서 기분을 새롭게 하지만, 이런 새로움은 교실에만 들어서면 백만 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다. 빽빽한 업무의 숲 사이로 졸음에 빠진 학생들의 옹알이가 들리고 교사들의 탄식은 교무실 천장을 두드린다.

 분명 겨울 수련회 때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결한 수업과 과감한 업무 해결력, 인성 교육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자신을 그려 보지 않았던가. 새잎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새롭게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를 새롭게 할 가르침의 핵심 기술은 없을까? 인성 교육도 생활 지도도 수업도 온전히 내 것이 되어 나도 아이들도 완벽한 수업을 할 날은 언제일까. 아마 주님이 재림하셔야 가능할 테지만, 그래도 나의 바람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르치는 자가 오히려 ‘무수리’가 되어 가는 것 같은 요즘, 진정한 교육의 고수가 무림을 누비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