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복직을 기다리며
오늘 학교에 복직원을 제출했다.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맡기 1년 전인 2007년부터 휴직을 했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대표직을 수행했으며, 2013년 한 해는 정책위원으로 섬겼으니, 만 7년 만의 복직인 셈이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03년과 2004년에도 휴직을 했었고, 2000년에도 휴직을 했었다. 그리고 1988년 첫 발령을 받자마자 3개월 후에 바로 군 휴직을 했으니, 만 26년 교직 생활 동안 절반인 13년을 휴직을 한 ‘대한민국 최장 기간 휴직을 한 교사’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교직 발령 직후 2년 3개월간의 군 휴직이야 국방의 의무를 위한 것이었으니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후 교직 생활에 재미를 붙여갈 즈음에 내 교직 생활에 이렇게 오랜 휴직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군 제대 후 첫 학교 근무하면서 한편으로는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사로서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참여한 기독교사 모임이 이후 나의 교직 생활을 이렇게 휴직 투성이 불량 교사의 자리로 내밀었던 것이다.
이미 맛 본 자는 다른 길을 갈 수 없다
1992년 소박한 마음으로 참석했던 기독교사 모임은 1995년을 지나면서 ‘기독교사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판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8년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면서부터는 학교 일과 병행하기에는 너무 벅찬 수준까지 와 있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기독교사들의 연합 과정에서 그리고 기독교사대회 준비 과정에서 하나님이 기독교사들을 통해서 이 땅 교육계 가운데서 하시고자 하는 그 꿈을 이미 보았고, 또 맛을 본 상태였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 우리가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다 하고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군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 비전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했고, 그것은 퇴직 후 전임 사역으로 뛰어드는 것을 포함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우선적으로 송인수 선생님과 나의 몫이었다.
이렇게 나와 송인수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상황에 하나님의 비전을 맞출 것이 아니라 퇴직을 해서라도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운동의 진도를 따라 맞추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공동체적 준비나 결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2회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던 2000년 공동체적인 후원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송인수 선생님은 휴직을 했다. 육아휴직이었다. 다행히 아무런 생계의 보장 없이 두 사람이 1년간 휴직을 한 덕분에 좋은교사운동은 후원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그 다음 해 나와 송인수 선생님은 사무 간사를 두고 복직을 했지만 이미 운동은 사무 간사 체계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할 수 없이 송인수 선생님은 2002년 1년 더 휴직을 했다. 그리고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체계로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운동을 향한 도약이 불가능하겠다는 판단 하에 2002년 말 송인수 선생님이 퇴직을 하고, 좋은교사운동 전임 대표로서 5년간의 임기를 시작했다.
퇴직과 복직의 갈림길에서
나는 송인수 선생님이 퇴직 후 전임 대표 사역을 시작하던 2003년과 2004년에 대학원 휴직을 통해 동역하다가, 2005년과 2006년에 복직을 했다. 하지만 송인수 선생님이 2007년에 마무리되는 5년 기간의 대표 임기를 더 연장하지 않고 새로운 사역을 개척하겠다는 결정을 한 후 그 짐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하지만 송인수 선생님은 좋은교사운동의 새로운 대표가 계속해서 퇴직하는 구조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좋은교사운동을 그만두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사역을 시작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시금석으로 좋은교사운동 상근 사역 자체가 고용 휴직으로 인정되는 법 개정을 시금석으로 삼고 기도와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인수 선생님이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그만두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이 법이 통과가 되었다.
이러한 송인수 선생님의 자신의 인생의 미래를 건 간절한 기도와 수고 덕분에 나는 퇴직을 하지 않고 고용 휴직을 통해 5년간의 대표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 역시 5년간의 대표직을 마무리할 시점에 고민이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 5년간 좋은교사운동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가지게 된 안목을 살려 퇴직 후 ‘새로운 운동을 개척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복직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어떤 분은 아예 나에게 ‘학교폭력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학교폭력 문제와 씨름해 보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에 내가 학교 현장에 복직해 특별한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회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될 것이라며 복직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들과 이 시대를 함께 견뎌가고 싶다
결국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선택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많은 선택 앞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강권하시고 특별한 부르심이 없는 한 지금껏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인도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즉, 내게 있어 ‘교직의 안정성’ 자체는 이미 1995년에서 1998년 즈음 기독교사연합 사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비전 앞에서 이미 못을 박았다.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퇴직을 요구하신다면 언제든지 순종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후원 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비전과 사역의 긴급성 때문에 휴직을 하던 그 상황에서 휴직이 헌신이었고 퇴직이 헌신이었지만, 안정적 후원 체계가 갖추어진 지금은 휴직이나 퇴직 자체가 헌신의 증거일 수는 없다. 오히려 좋은교사운동 회원 선생님을 포함한 많은 선생님들이 교직에서 아이들을 붙들고 있는 이 자체를 힘들어하고 할 수만 있다면 잠시만이라도 교직을 떠나 쉬고 싶어하는 이 상황에서는, 다시 학교 현장에 돌아가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이 시대를 견뎌내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지금 내게 요구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7년의 공백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교직에 들어가더라도 다른 선생님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교직을 잘 감당하지 못할 것임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많은 선생님들이 염려하듯 여러 차원에서의 부적응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 하지만 연약함과 한계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듦으로 그 가운데서 사람들의 논리와 평가로 파악할 수 없는 영적 비밀과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내게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변함없이 내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원리였다. 또 인간이 보기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매이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며, 또 나를 통해 기독교사운동을 어떻게 풍성케 하실지 기대감이 있다. 인간은 매일지라도 하나님은 매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보물은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놓는 법이다
그 전에도 몇 차례 휴직과 복직을 반복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복직 자체가 처음 맞는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복직은 7년의 공백이라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낯선 길로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모험을 즐기며 나아가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복직의 현장 가운데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쁨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기도가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보물은 늘 예상치 못했던 곳에 숨겨져 있는 법이다. 복직의 여정 가운데서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보물을 숨겨두시고 아주 익살스런 표정으로 “어서 와서 내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으라”며 채근하시는 그분 앞에서 모험과 호기심으로 달려가는 소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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