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칸트, 해외 탐방을 떠나다
“선생님, 해외여행 안 가세요?”
“예, 저는 그냥 칸트처럼 살려고요.”
나라고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광에 대한 욕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4명의 아이를 키우다 보니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해외여행을 꿈꿀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기독교사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다 보니 방학이라고 해서 덜 바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직 초기 교육청 단위 수업 공개를 열심히 한 덕분에 젊은 교사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 해외 연수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기독교사 수련회 일정과 맞지 않아 거부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내 속의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나름대로 설정한 보다 높은 가치에 근거한 적극적인 선택의 삶임을 강조하기 위해 애꿎은 칸트를 끌어들이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그 좁은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세계와 우주를 품은 가장 보편적인 사고를 했던 칸트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래서 40대 초반까지 차를 사지 않고 버텼던 것이나 지금까지 스마트폰을 구입하지 않고 2G 핸드폰을 고집하고 있는 것처럼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을 내 삶의 하나의 기준으로 유지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던 적이 있다.
세계기독교사대회라고?
하지만 돌아보면 해외 ‘여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해외 ‘탐방’의 기회는 여러 번 주어졌고, 이러한 해외 탐방의 경험은 내 삶의 많은 자양분이 되었다. 내가 제일 처음 외국 땅을 밟아본 것은 1996년 여름이었다. 당시 우리는 1998년 여름에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하기로 결정을 해 놓고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조직도, 일을 해 본 경험도 없는 가운데 오직 ‘1,000명의 기독교사들을 모아 이 땅의 교육을 새롭게 하겠다’는 비전만 갖고 있을 뿐,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하는 막연한 상황이었다. 이때 우리를 도와주던 Wesley Wentworth 선교사님이 호주에서 세계기독교사대회가 개최되니 가 보라고 권유를 하셨다.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 있던 우리는 여러 제약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참석하기로 했다. 그래서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4박 5일간의 세계기독교사대회에 참석했고, 이후 4~5일 동안 시드니 근교의 기독교학교들을 탐방하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그때 우리가 참석했던 세계기독교사대회는 공교육에 속한 기독교사들을 위한 수련회가 아닌, 호주에 있는 기독교학교 소속 교사들의 재교육을 위한 수련회에 다른 나라의 기독교학교 교사들을 일부 초청한 수련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모든 교육 영역과 교사가 부딪히는 세밀한 일상을 다루는 매우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강의를 개설하고 함께 논의하는 모습은 큰 도전이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는 기독교학교들의 모습은 그 동안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던 기독교 학교의 현실을 실제로 느끼게 해 주었고, 한국에서의 기독교학교 운동을 한다고 할 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안목을 열어 주었다.
‘평양’을 거쳐 ‘해주’까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 좋은교사운동에서 진행 중인 북한 학교에 학용품 보내기 운동과 관련해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북한 방문은 평양 시내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방문했던 기관은 미국 국적을 가진 재미동포 농업학자가 황해도 해주 지역의 협동농장 3개를 위탁받아 경영하고 있어서, 평양에서 해주까지 북한 지역을 관통하면서 협동농장과 주변 주택, 그리고 그곳 간부들과의 대화를 통해 평양이 아닌 보통의 시골 지역의 현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이는 2003년과 2004년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한 북한과 통일에 대한 지식에 구체성과 현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 주었다.
‘꼼꼼 원순’, 적자 생존
2008년 즈음하여 한국 교육에 북유럽 교육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스웨덴에서 연구년을 보냈던 안승문 선생님이 교원단체, 교육시민운동, 교육학자, 일반 시민운동계와 언론인 등을 아울러 북유럽 교육 탐방단을 꾸렸는데 거기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학교들을 탐방하고 그곳 교육 전문가들과 이야기할 기회들을 가졌는데, 그 동안 우리 현실에 갇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교육의 본질이 실제로 어떻게 가동될 수 있는지를 확인한 소중한 기회였다.
특별히 그때 함께 동행했던 박원순 서울시장(당시에는 희망제작소 소장이었다)의 태도는 내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그는 여러 탐방 학교들과 기관들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 내용들을 빠짐없이 노트북에 기록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부분들까지 일일이 사진으로 촬영했다. 공원 벤치, 교통신호, 화장실 등 놓치는 것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저녁이 되면 함께 동행했던 일행들과 일일이 인터뷰를 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그 내용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노트북을 보니 세계에서 가 보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를 방문했는데, 각 나라의 일상들을 세밀하게 남겨놓은 기록들은 감동이었다.
좋은교사 북유럽 탐방단의 탄생
2009년 북유럽 탐방을 다녀오면서 좋은교사운동 회원들로만 구성된 북유럽 탐방단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일반 교사나 학자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북유럽 교육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을 같이 생각해 보고, 한국 기독교사운동에 주는 시사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핀란드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던 김병찬 교수를 통해 그곳 일정을 짜줄 수 있는 분을 소개받고, 덴마크는 송순재 교수님의 오랜 친구인 에기디우스 교수님을 통해 일정을 짜서 2011년 제1기 좋은교사운동 북유럽 교육 탐방단을 출범할 수 있었다. 관광이 거의 없고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학교 탐방과 강연, 나눔으로 꽉 짜여진 일정에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을 하는 연수였지만 기쁨으로 참여하고 그 가운데서 교육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하는 선생님들을 보며 해외 교육 탐방이 기독교사들을 위한 좋은 연수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입소문으로 인해 올해까지 4기가 이어지고 있다.
좁게 보아야 더 선명하게 보인다
2013년은 좋은교사운동 대표직을 내려놓은 후 좋은교사운동으로부터 1년간의 연구년을 제공받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몇 가지 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가운데 3차례의 해외 탐방 기회를 가졌다. 6월 말의 베를린 독일 통일 연구 기행과 12월의 케냐 선교지 방문과 대학생 집회에서 교육 관련 강의를 했던 내용은 <좋은교사> 잡지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2013년 8월호와 2014년 2월호). 그리고 지난 1월에는 회복적 생활교육 활동가 과정 선생님들과 캐나다 지역 회복적 생활교육 현장 탐방을 하고 돌아왔다. 한 나라의 교육 전반을 둘러보았던 북유럽 교육 탐방과는 달리 ‘생활교육’이라는 하나의 주제만 좁혀서 보니, 그 전에 보이지 않던 많은 부분이 보이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해외 탐방을 생각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명제다. 다른 말로 “준비한 만큼 배운다” “자신이 가진 열망과 문제의식 만큼 느낀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굳이 해외 탐방이 아니더라도 국내 탐방이나 연수, 혹은 개인적인 고민과 시도를 통해서도 해외 탐방 이상의 배움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방법이 아니라 열망과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해외 탐방은 그 동안 죽어 있던 열망과 문제의식을 손쉽게 깨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면에서 거기에 들인 경비가 아깝지 않은 좋은 배움의 기회라는 것 역시 분명한 것 같다.
'정병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본질의 홍수 속에서 본질 살리기(2014.5) (0) | 2014.07.09 |
---|---|
교과서 단상(2014.04) (0) | 2014.06.05 |
아프리카도 보아야 하리라(2014.02) (0) | 2014.06.05 |
복직을 기다리며(2014.01) (0) | 2014.06.05 |
불편해도 괜찮아(2013.12) (1) | 2014.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