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 칼럼
불편해도 괜찮아
풍요의 이면
얼마 전 중학교 2학년인 막내아들의 책상과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여기저기 처박혀 있는 쓰다만 연필과 볼펜 등이 수북이 나온다. 어디 연필과 볼펜뿐이랴? 철 지난 MP3, 시계, 카메라, 손전등 등 여러 물건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나뒹굴고 있다. 이것을 보며 아내가 한마디 한다.“ 우리 어릴 때는 물건들이 귀했지. 그때는연필하나, 지우개 하나에도 다 스토리가 있었고, 추억이 있었는데….”그러고 보니 우리는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학용품과 전자 제품을 마음껏 사 주는 풍요로움을 선물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필 하나가 귀해서 연필이 작아지면 볼펜 대에 끼워 사용하며 물건 하나하나와 교감했던 스토리와 추억을 다 빼앗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선물한 물질적 풍요와 그로 인해 아이들이 빼앗긴 스토리와 추억을 계산한다면,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선물한 것일까?
각 가정에 유선 전화가 언제 보편화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3 때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집에 가는 막차를 놓쳐 교실로 돌아가 잠을 잔 적이 있는데, 그때도 집에 연락할 길이 없었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대학 시절 즈음에 유선 전화가 보편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때는 편지를 참 많이 썼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놓고 답장을 기다리다 우체부 아저씨를 맞는 그 설렘은 지금 그 어떠한 편리함이 대체해 줄 수 없는 잃어버린 감정이다. 미팅 후 상대방 여자에게 전화가 올까 아무 데도 못 가고 저녁마다 전화기 앞에서 전화를 기다리던 그 긴장감도 지금 그 어떤 발달된 통신수단이 재연해줄 수 없는 감정이다.
물론 삐삐, 핸드폰, 스마트폰, 이메일, 카톡, 밴드에 이르기까지 통신 수단의 발달로 인해 여러 사람들과의 빠른 연결이 주는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과 빠름이 과연 우리로 더 깊이 만나고 더 많이 사랑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이러한 도구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감정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소통의 기술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기술 발전이라는 우상
통신 기술 발달이 가져온 부작용은 단지 이전 아날로그 세대가 가졌던 감성들을 빼앗아 가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특별히 인터넷, 핸드폰,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디지털 기기의 발달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어린 아이일수록 심각하게 나타난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만 하더라도 부모의 통제 범위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중독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스마트폰을 통한 가상 세계가 중심이 된 생활양식이 일상의 구체적인 관계에 헌신하며 그 가운데서 사랑과 행복을 만들어 가는 우리 삶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제 이런 불필요한 기술의 발달을 중단하자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삶에 해가 되더라도 계속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그 계통의 기업이 타격을 받게 되고 이것이 경제를 위축시켜 우리 삶을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기술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것은 인류의 풍요와 편리함을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 할 것이지 이를 이유로 기술 발전에 태클을 거는 것은‘인류 사회의 진보를 막는 반역죄’라는 무언의 사회적 압력에 굴복한 것일까? 어쨌든 기술의 발전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계속되는 것이 정당하며 더 풍요해지고 더 편리해지는 것은 절대 선이라는 신앙이 형성되었고, 이는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우상이 되어 버렸다.
풍요와 편리함을 넘어서
자고 일어나면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대형 마트에는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물건이 넘쳐나고, 호화롭고 깔끔한 고급 식당들이 늘어나고, 우리 삶을 좀 더 편리하게 하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더 많은 노동으로 내몰려야 한다. 더구나 이 모든 풍요와 편리함은 전에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에게는 놀라움이고 편리함이지만, 이러한 기술 발전 이후에 태어났거나 자라면서 기술 발전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이것이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 된다. 아니, 이 기술 발전을 소유하거나 누리지 못하면 오히려 불편하고 불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부모 세대는 자식들에게 이것을 제공해 주기 위해 허덕이지만, 자녀 세대에게는 부모가 이것을 사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자녀 세대는 이런 기술의 혜택보다는 부작용 속에 희생을 당하거나 소중한 것들을 잃고 마는 역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기술 발전과 경제 발전이 지속됨에도 우리의 삶은 더 가난해지고 허덕인다. 당연하다. 아파트 관리비, 자동차 유류비와 수리비, 전자 통신비, 외식비, 학원비 등 이전 세대가 감당할 필요가 없었던 돈을 지출하고 나면 남는 돈이 많지 않다. 거기다가 교회당 빌려 결혼하고 갈비탕이나 국수를 대접한 후 남는 축의금으로 신혼여행 가고, 단칸 월세방에서 신혼살림 시작하던 시절에 비해 요즘 결혼 비용은 얼마나 증가했는가? 이러니 결혼하기도 쉽지가 않고, 아이 낳기도 쉽지 않다. 당연히 나 하나 살기 벅찬데 이웃을 돕고 나눌 돈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이제 멈추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가 계속 더 발전해야 하고 좀 더 풍요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술과 경제 발전이 멈추면 우리 모두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전거가 넘어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페달을 더 세게만 밟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페달을 멈추고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갈 것이며, 과연 이 길의 끝이 어디 일지를 생각해야 한다. 소득 수준을 몇 만 불 더 올려주겠다는 지도자에 투표해서는 안 되며, 내 집값이나 주식이 떨어질까 봐 부도덕한 지도자를 뽑아서도 안 된다. 과연 어떤 사회가 되어야 우리 자녀들이 좀 더 평안하고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지속 가능한 발전일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라는 우상에게 굴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편리하고 좋은 물건이 있다 할지라도 그 편리함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요구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풍요로움과 화려함, 편리함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고 이런 것을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다면,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치에 비추어 이런 부분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라도 불편한 영역을 남겨 두고, 그 불편함이나 소박함 가운데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과 정체성을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공동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실천은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시대의 흐름이 너무 거세다. 그러므로 교회와 다양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공동의 삶의 방식들을 함께 실천함을 통해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어야 한다. 전기와 전화 등 현대 기술의 많은 혜택을 거부하거나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시대에 뒤떨어진 특이한 부류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들과 똑같이 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기술 문명의 발달을 받아들이기 전에 최소한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철저하게 토론하며 천천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다. 특히나 기술 문명의 홍수 속에서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계승 발전하여 이 시대에 제시해야 할 소중한 영적 자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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