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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분별과 지혜(2018.8)

정병오 칼럼

분별과 지혜

 

내가 뭘 안다고?

병오야, 이번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남북통일 관련해서 선언을 발표했다는 소식 들었지? 그게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을 복음주의 입장에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 글을 하나 써 주면 좋겠다. 그 글을 우리 단체가 발행하는 QT 잡지 권두언으로 싣고 싶다.”

제가요? 제가 뭘 안다고?”

! 그래도 4년 동안 선교단체 훈련 충실히 받고 복음의 기반 위에 충실히 서 있으면서 복음주의 입장에서 사회 참여 문제도 고민해 온 네가 안 쓰면 누가 쓰겠냐?”

. 그럼 한번 써 보죠.”

그 때가 19883월쯤이었고, 나는 그 해 2월에 대학 졸업을 하고 중학교 초임 교사로 갓 발령을 받아 적응 중이었다. 대표 간사님의 전화를 받은 후 그 선언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의 정식 명칭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선교적 전통’, ‘민족 분단의 현실’,‘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민족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기본 원칙’,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 교회의 건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과제등의 주제에 대해 당시로는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주장과 실천 사항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선언은 당시 정부가 통일 논의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에서 종합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참여와 실천의 의지를 선언했다는 면에서 통일 운동의 한 획을 긋는 선언으로 높이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내용들이 당시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이후 정부의 통일 정책에 한 가지씩 담기고 차츰 실현된 것을 볼 때 이후 통일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그릇에 담기지 않는 내용들 앞에서

하지만 당시 나로서는 두 가지 면이 마음에 걸렸다. 이 선언이 담고 있는 분단 현실 인식이나 통일 방안이 당시 진보적인 민주화 운동에서 주장하던 내용을 거의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내가 초중고 시절 군사 정부로부터 받아 왔던 냉전 교육이 왜곡되고 잘못된 부분이 많을 것이라는 의심은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보적인 통일 운동 진영에서 주장하던 현실 인식이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려니 두려운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회의 선언이라면 성경과 맞먹는 진리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현실 인식과 통일 방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분단 현실에 대한 신앙적 관점에서 죄책을 고백한 부분이었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22: 37~40)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방지의 명목으로 최강 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33:11~20, 44:2~7)를 범했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통일 운동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그 때까지 나는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는 개인의 죄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민족의 죄에 대해 고백하거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대응에 대해 회개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그리고 혹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시 일반적인 교계 분위기는 진보적인 교회나 교단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지만, 대다수의 보수적인 교회나 교단에서는 그 선언문에 나오는 미군 철수라는 부분을 부각하며 이 선언문이 북한의 계략에 이용당할 수 있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실 미군 철수라는 주장이 들어있긴 했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한 상호간에 신뢰 회복이 확인되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평화와 안정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을 때라는 전제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교회나 기독교인들도 오랫동안 반공주의 테두리 내에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관점에서 전체를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마음이 참 복잡했다. 분명히 그 당시로서는 필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고, 당시 냉전 분위기를 뛰어넘는 용기 있는 내용인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관점을 바탕으로 시대의 모순을 해결할 답과 비전을 이렇게 제시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내 신앙의 인식과 소화 능력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이야기였고, 또 획기적인 주장이었기에 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불편하고 힘이 들었다.

이러한 여러 복잡한 생각과 두려움으로 인해 그 때 나는 이 선언문의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가 복음의 가르침대로 제대로 살아내서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세상을 비출 때 세상의 모순이 드러나고 세상이 교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교회로 나아올 텐데, 교회가 이러한 복음에 합당한 철저한 제자도의 삶을 살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선언을 하는 것이 무슨 그리 큰 의미가 있고 힘이 있겠는가 하는 요지의 글을 썼던 것 같다. 아마 당시 내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때 왜 그 글을 썼던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때 내가 썼던 글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분단 인식이나 통일 방안 등과 관련해서는 그 내용이 정부나 보수 진영이 주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보 진영이 주장하는 것인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냥 역사적 실체를 좀 더 명확하게 혹은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밝히 아는 것이 중요하고, 통일 방안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는 국내외 정치 외교적 안목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그 초월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역사를 비추고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개별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성도를 견실히 세우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개인 성도나 혹은 기독교 NGO, 특수한 목적을 가진 교회 연합 단체들은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내 안목으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것을 교회가 이러한 민족적 죄책 고백과 더불어 초월적 진리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넘어서고 이 민족을 사랑과 화해, 평화로 끌어가고자 하는 노력을 폄훼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특히 얼마 있지 않아서 세계사적인 변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9년부터 동구권에 밀어닥친 민주화의 바람으로 동독과 서독이 극적인 통일을 이룩했으며,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소련 공산당이 몰락했으며, 동구 공산권들도 다 공산주의를 버리고 민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구 공산권의 변화에는 여러 정치경제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서구 교회와 동구 교회의 교류, 공산권 내에 있던 동구 교회들이 민주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부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교회가 그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되지 않고 이념을 뛰어넘고 상대화하는 노력을 핍박 가운데서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나의 무식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러한 급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부지런히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는데, 그의 자녀 된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그냥 이전에 내가 알던 지식이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세상 역사 한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데, 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종교의 테두리 안에 나를 가두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세상의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든 그것 안에 나의 신앙을 가두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사상과 이념을 비판적으로 보고 행동하려고 애써야 함을 자각했다.

그래서 1994년 대학원에 진학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북한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북한이 아닌, 지금 변화하는 북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이렇게 2년 정도 공부를 하고 나니 나 나름대로 북한이나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짧은 공부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남이든 북이든 변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큰 흐름은 잡히는 듯했다. 그리고 좋은교사운동을 하면서 기독교의 진리가 세상의 여러 구체적인 문제들과 어떻게 만나야 세상 사람들이 감동하고 따라올 수 있는 변화를 선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경험들도 쌓이기 시작했다.

 

새롭게 열리는 변화를 담을 그릇을 준비했는가?

지난 4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은 남북 관계의 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물론 남북문제 해결이라는 것이 수십 년간 겹겹이 쌓인 적대적 사건과 감정을 넘어야 하는 것이고, 남북뿐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열강의 복잡한 이해관계의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시원하게 문제가 풀리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한미 군사 훈련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으며, 북한이 한국 전쟁 때 북녘 땅에서 전사했던 미군들의 유해를 미국에 넘겨주고 있다. 남북 간에도 철도와 도로 복구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었으며, 개성공단 재개도 곧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제 남북 화해와 평화는 어떤 개인이나 한 국가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큰 흐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은 공부를 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의 변화를 보려고 해야 하고 세계 정치의 흐름을 보는 안목도 갖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세상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나 신학적 틀로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잘 보이지 않으면 그 틀을 내려놓고 다시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관련 신학과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야 소극적으로는 죄를 덜 지을 수 있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