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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평화의 여정과 교회를 위한 기도(2018.7)

정병오 칼럼

평화의 여정과 교회를 위한 기도

 

지난 612,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보장,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제 북미 관계는 지난 65년간 이어진 휴전과 적대 관계를 벗고 상호 협력하는 정상적인 국제 관계로 접어들었고, 한반도도 이제 크고 작은 도발과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평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전쟁이나 일방적인 흡수 방식이 아닌 한반도식 평화통일의 길도 본격적으로 열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약속 이행 과정에서 수많은 돌출 변수가 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후퇴와 전진을 반복할 것이다. 실제로 북미 정상의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도 마음 졸이다가 기뻐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았던가. 한미정상회담 직후,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함으로 핵 폐기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에 밝힌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했다. 그러자 이틀 후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일체의 격식 없이 만나 완전히 끝난 줄 알았던 북미정상회담을 다시 살려 놓았다. 남북 정상이 이렇게 쉽게 그리고 전격적으로 만나 현안을 논하고 국제 정세의 물꼬를 돌려놓는 일 역시 그동안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분단 체제의 낡은 허울을 벗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70년 우리를 지배해 왔던 남북 간의 분단과 대립, 불신과 반목이라는 상황이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분단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외세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서로를 향한 무차별적 살상이 진행되면서 남북은 내 부모와 형제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더하여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남북의 지도자들은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자기 통치의 명분으로 오랫동안 활용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분단 상황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은 세대에게 분단은 도무지 벗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고한 체제라 하더라도 역사의 시간 앞에서는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남북한 분단 체제도 세계적인 냉전 체제의 붕괴, 남한 사회 민주화의 획기적 진전, 새로운 생존 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존립의 기반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북한의 현실이 맞물리면서 그 공고해 보이던 분단 체제의 골조가 다 썩어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촛불혁명에 기반한 문재인 대통령의 담대하고 겸손한 평화 전략, 완성된 핵무기 체제를 체제 안정과 경제 발전과 교환하겠다는 북한 지도부의 절박한 판단, 세계 패권의 지위를 내려놓고 자국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비주류 트럼프의 장사꾼 감각이 맞물리면서 껍데기만 남아 있던 분단 체제의 골격을 걷어 버린 것이다.

 

뼈 속에 남아 있는 분단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후에 남북 간 평화 체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순탄하게 가지 않고 굴곡을 겪는다고 해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다시 서로를 불신하고 적대시하는 분단 체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이미 경험한 화해와 평화의 비전에 기반하여 문제를 풀어 가려는 자세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북한이 보이고 있는 핵 폐기나 정전과 평화 체제 구축 의지는 모두 위장 평화 공세이며, 이러한 북한의 전략에 한국과 미국이 모두 속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물론 현 상황에서는 일부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 극우 네티즌들만 이러한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혹 남북 평화를 향한 여러 일정들이 암초를 만나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들에 동조하고 휘둘릴 가능성도 있다.

지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이번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에 기반한 분단 체제의 큰 틀은 무너졌고 다시 회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남북한 국민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남아 있는 분단의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난 70년 분단 체제 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들이 했던 경험, 그들이 받았던 교육으로 인해 그들의 뼈 속에 심어졌고 그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단 체제의 큰 틀이 무너진 것에 만족하지 말고 국민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남아있는 분단의식을 평화의 새로운 의식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도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민간 차원에서의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평화의 여정과 교회의 역할

민간 차원의 노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기관이 교회다. 이는 교회가 매주 정기적으로 모이는 매우 충성도가 높은 지역 공동체인 것도 한 이유겠지만, 현 상황에서 교회가 기존의 분단 의식을 붙들고 새로운 평화 체제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집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전체 한국 교인들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지난 촛불정국에서도 확인한 바지만 다수의 교인들은 촛불집회에 찬성을 했고, 현 평화 체제로의 이행에 찬성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태극기 집회의 주축이 교회의 어른들이었고, 일부지만 교권의 중심에 있는 목회자들이 이들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 왔던 반북 이념을 신앙의 이름으로 더욱 공고히 해 온 집단이기 때문에 옛 분단 체제의 흐름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세력들이 가장 선호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이후 한국 사회가 분단의 낡은 틀을 버리고 평화로 나아간다고 할 때 반공 이념과 신앙을 결합한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평화의 큰 틀로 이끌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교회 속에 있는 평화의 자원을 찾아서

교회 내 분단 체제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평화의 틀로 견인하고자 할 때 이들을 비난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논리적인 접근도 한계가 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있는 북한이나 평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한 생각과 마음을 지렛대로 삼아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확장시켜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그들의 인권을 개선해 주자는 생각이다. 실제로 이들은 지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에 앞장섰고,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들어오는 일과 남한 사회 정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들의 수고가 다 효과적인 것은 아니고 이들의 의도가 다 순수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근본 동기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이제 변화하는 시대 가운데 어떻게 북한 동포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그들의 인권을 제대로 개선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를 같이 논의할 수가 있고, 논의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지렛대는 북한 선교다. 이들은 북한이 우리가 가야 할 마지막 땅끝이라고 생각하고 북한이나 혹은 국경 지대에 선교하는 선교사님을 후원하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정세를 어떻게 활용해야 북한 동포들의 종교적 자유가 확대되고, 그들에게 실제로 복음이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같이해 볼 수 있다.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

남북 관계가 분단 체제를 벗고 평화 체제로 나아가면 갈수록 우리 마음을 더 졸이고 애간장을 타게 만드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 중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어야 하는 것은 남한 교회가 평화로 가는 역사의 큰 흐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힘써 교회가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