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단 일기

사랑, 고것 참


아줌마 쌤의 계속되는 교사도전기 18

사랑, 고것 참

 

커플 하나

반별 댄스 대회 때 남녀 열 커플을 억지로 만들어 놓았더니 지들끼리 좋아라 늦은 밤까지 연습하더라는 이야기를 언젠간 했던 기억이 난다. 아, 그런데 고것들 중 두 커플이 1학기말 공식적으로 커플을 선언하더니 방학 사이 뭔 일이 생겼는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공부 잘하고, 키 크고, 잘생긴 우리 반 선남과 맑은 두 눈에 귀여운 미소, 긍정적 마인드의 선녀의 이상적 만남이어서 우리 반 녀석들뿐 아니라 둘을 알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물론 살짝 걱정이 있기는 했지만. 선남은 공부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고, 베이스 기타, 다양한 독서 등 자기 관리가 잘되는 녀석인데 반해 선녀는 지각쟁이에 과제물 미제출, 준비물 미비 등 평범함을 기준으로 볼 때도 약간 아쉬움이 있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쁜 커플이 되기를 바라는 담임의 마음이 있었다면 두 녀석 다, 신앙이 있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교회에서 찬양 반주를 하고 있고, 그럴싸한 외모를 갖추었다는 것. 물론 담임으로서는 선남 녀석의 공부가 혹 떨어지지는 않을까와, 어쩌면 선남 녀석 때문에 선녀 녀석의 생활 태도가 한층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가 섞여 마음이 쓰였었다.

그런데 둘에게 뭇사람들의 관심이 지나쳤는지 방학 중 선남 녀석에게 문자가 날라 왔다. “선생님,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요.” 잠시 걱정과 안도감이 교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니들 원래 친구 아니었냐?” 하고 단문으로 반응했었다. 그리곤 개학.

대각선으로 앉아 있어 국어 모둠 활동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녀석들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책상을 붙여 놓고 앉기는 하되 공책에 고정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각자 자기의 활동 준비에 열중하는 척. 그 사이에 낀 다른 두 녀석은 함께 침묵을 지켜 주는 것을 의리로 아는 건지 같은 침묵으로 일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나의 시도도 헛일이었다.

아이고, 이 녀석들. “니들 싸웠냐?”, “친구라더니, 이젠 웬수가 됐냐?”,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됐냐?” 반응을 요구하는 나의 물음에도 진의를 알 수 없는 “아니오”로 속내를 감추어 버린다. 치사한 것들.

 

커플 둘

반면 공식적인 절차는 없었지만 자연스레 알려진 또 한 커플. 신앙도 다르고(무교, 기독교), 피부도 다르고(하얗고, 까맣고), 좋아하는 과목도 다른 (국어와 사회, 수학과 축구) 요 녀석들은 아직까지도 알콩달콩 사랑인지 우정인지를 쌓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녀석의 공통점은 어느 면으로 보나 평범하다는 것. 공부도 중간, 외모도 중간, 친구 관계도 원만, 평범한 집안 등 오히려 친구들이 만만하게 보는 녀석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만만하다는 것은 귀여우며 긍정적이고 따뜻하며 착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앞 커플, 선남선녀를 향한 관심이 혹 질투일 수도 있었다면, 이 커플을 향한 관심은 사랑스러움(?)이 아닐까 싶다. 서서히 자연스럽게 자신들도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것을 쌓아 가고 있는, 정말 사랑스러운 녀석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담임인 나를 절대 신뢰한다. 성적 향상도 당연. 앞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희망에 따라 우리 반 중심 자리에 앉아 있는 고 녀석들.

 

사랑이 무엇이기에

요 두 커플 녀석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어떻게 수업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요즘 딸내미와 보고 있는 드라마가 생각났다. ‘동방신기’ 그림자라도 등장한다는 소문만 들려도 반드시 고 시간에 화면 앞에 턱하니 앉는 딸내미를 둔 덕(?)에 보고 있는 두 개의 드라마. 암에 걸린 30대 중반 여인이 진실한 사랑을 만나지만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이야기 <여인의 향기>. 보잘것없는 조건을 가진 한 여자를 재벌 2세 둘이 동시에 좋아한다는 상투적인 스토리인데도 보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드는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

이 두 드라마의 주제곡을 함께 들었다. 물론 영상도 곁들어. 그리곤 사랑을 주제로 한 자신의 애창곡이나 애송시를 공책에 베껴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다. 물론 베껴온 시가 반드시 애창곡이나 애송시는 아니겠지만 지금부터 그렇게 만들면 된다는 억지로 낸 숙제. 모둠별 나눔과 발표 내내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쑥스러워하는 녀석들.

그들에게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라고 했다. 무엇보다 커플 녀석들이 생각하는 ‘사랑’이 궁금했다. 나름 고 또래 녀석들의 사랑을 최근에 겪은 증인들이 아닌가.

선남 : 사랑은 모든 것을 소유하게도 하고 모든 것을 버리게도 한다. 개떡 같기도 하고 꿀 같기도 한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평생 책 한 권 읽지 않고 글 한 줄도 쓰지 않던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세상을 찬미하는 멋진 시를 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사람이 사랑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게으름뱅이가 세상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시간 흐르는 것도 잊는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떵떵거리던 권력자가 사랑을 위해 모든 권세를 버리고 목숨을 버리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녀: 사랑이란 ‘물’이다. 너무 많으면 흘러넘쳐 버려지게 되고, 반대로 너무 적으면 더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갈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물이다.

평범 남 : 사랑이란 힘들 때 위로가 되고 그냥 이유 없이 생각나는 것이다. 사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내가 사랑을 한다면 그걸 것 같다.

평범 녀 : 사랑이란 ‘오글오글’. 왜 사랑을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 걸까? 내가 드라마에서 본 사랑들은 너무 오글거려서 토 나올 것 같았다. 사랑을 하면 사람들이 오글오글 거린다.

 

요 녀석들의 사랑 귀엽지 않은가. 선남선녀 커플 녀석들은 나름대로 사랑의 가치를, 평범 커플 녀석들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듯 순수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사랑? 그거 진짜 뭘까?

 

청춘 아줌마의 소망

가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사랑’이 손에 닿지 않아 허우적거리는 ‘나’를 들여다보곤 한다.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고요히 누워 푸른 하늘과 바다의 시원함, 평온함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바다 전체를 한눈에 보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싶어 현재 누리는 바다의 푸름과 풍성함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욕망과 아주 조금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

귀티 나고 잘생기며 당당한 외모, ‘억!’ 소리 나는 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 떼어 주고도 끄떡없는 재력, 한계 지을 수 없는 인간관계망으로 언제든 받을 수 있는 도움, 다수의 언어 실력과 다방면의 전문가적 지식을 겸비한 실력, 게다가 순수함과 고결함을 사랑하는 영혼까지 갖춘 사람. 이런 남자를 보면 나이 상관없이 가슴 뛰는 설렘으로 사랑을 꿈꾸는 여인들. 그런데 사실 이런 완벽한 형상은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우리, 아니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형상과 성품을 온전히 담고 계신 분이 바로 그분이 아닌가. 참 명백하고도 거짓 없는 진실인데 왜 그다지 자주 잊어버리는지.

오늘 종례 시간. 서바이벌, 밤 따기 체험으로 가을 소풍을 결정한 후 나는 가서 하루 종일 밤만 따겠다고 했더니, 그 순한 커플 중 한 녀석이 바로 반응한다. “진정한 아줌마시네요.” 그리곤 스스로 ‘헉!’ 하고 놀란다. 막말을 한 대가로 홀로 청소를 해야 한다는 일치된 주장을 하는 다른 녀석들을 보며 당황한 이 녀석이 내뱉는 별명이란. “늙은이라는 말은 안 했어요.” 참, 웃고 넘겨야 하는지. 어쨌든 명확히 이야기해 주었다.

“잘 들어, 난 아줌마라는 말 좋아해. 우리나라 성장의 힘은 어디에서?”

무슨 얘기일까 싶은 녀석들도 눈치껏 동시에 외친다.

“아줌마요.”

“좋아! 그런데 늙은이라는 말은 안 좋아해. 난 청춘이거든.”

 

늘 청춘으로 살고 싶은, 그래서 잘생긴 이성뿐만 아니라 사랑스런 아이들을 보고도 설렘을 느끼고, 무엇보다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말없이 행복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청춘으로 산다면 꽤 근사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교단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소를 하다가  (0) 2011.10.06
하나님의 고집  (0) 2011.10.06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0) 2011.09.14
에티오피아에서 교사로 사는 법  (0) 2011.09.14
빨래를 하며  (0) 2011.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