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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양영기의 교실 묵상 7 : 어둠의 교사 vs 빛의 교사 #2


 
양영기의 교실 묵상 7
어둠의 교사 vs 빛의 교사 #2

양 영 기


어둠과 빛


“세상의 빛은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두지만 마음의 어둠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참된 빛으로 인도한다.”


 어두운 곳에서 물건을 찾거나 몸을 움직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몸은 한껏 위축된다. 반면, 밝은 곳에서는 눈으로 들어오는 각종 정보에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즉흥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반응의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지만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해 실수의 가능성을 높이기도 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나 죄는 대부분 시각 정보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은 너무 많아 뇌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쉽게 지치기도 한다. 시각은 우리가 수용하는 정보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사도 요한은 시각과 관련된 인간의 죄를 ‘안목의 정욕(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 - 《쉬운성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서 느끼는 만족이 일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요일 2:16,17”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 잠 27:20”

 

 시각 정보 때문에 죄를 지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그날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왕궁 옥상을 한가로이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된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의 몸을 관람하는 것에서 그치지 못하였다. 다윗은 신하를 보내 그 여자의 신상 정보(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캐내고, 전령을 보내어 밧세바를 데려오고 동침하게 된다. 끝으로 다윗은 완전 범죄를 위해 충직한 장군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할 음모를 요압에게 전달한다. 이 사건을 보면 한 순간의 시각 정보가 가져올 엄청난 죄의 사슬을 보게 된다.

 한편, 어두운 곳에서는 더 이상 시각에 의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단순한 움직임도 조심하며 생각을 한 후에야 움직이게 된다.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의 생각도 깊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질문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어둠


 대답은 빛을 드러내고 질문은 어둠을 드러낸다. 대답이 드러내는 빛은 세상의 빛이요 사라질 빛이요 우리를 눈멀게 하는 빛이다. 반면 질문이 드러내는 어둠은 ‘마음의 방’이다. 그 방에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빛이 조금도 없음을 깨닫고 간절히 빛을 원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욱 밝게 보이며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더욱 빛난다. 눈물이 많은 곳에 위로가 넘쳐 난다.

 어둠의 영역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어둠 속에 갇힌 사람은 자유가 제한된다. 진리의 빛만이 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온전한 자유를 줄 수 있다. 그 빛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에서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에게 빛은 없었으며 빛을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래서 어둠은 율법과 같다. 어둠이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듯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또, 어둠이 빛의 존재를 요청하듯이 율법은 은혜를 요청한다. 실존적 자아와 대면하는 무지의 핵심에 인간의 ‘죄’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어둠 속 가장 깊은 심연에서 만나는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며 빛으로 나갈 수 있는 ‘어둠의 빛’이다.

 어둠의 심연 속에서 우리는 빛을 간구하게 되는데 그 빛은 곧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다. 결국 인류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는 빛을 세상에 가져온 것이다. 그 빛은 진리가 되었고 우리는 어둠의 불편함과 저주를 벗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은 여전히 어둠(죄) 속에 있지만 그 어둠은 빛에 의해 인도되는 어둠이며 잠정적인 어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사람은 누구나 짙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어둠을 인식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뿐이다.

 바리새파이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인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암흑의 사람일 뿐이었다. 예수님을 만나야 참된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빛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어떤 그럴듯한 것으로도 그 빛을 대체할 수 없다. 치밀하게 구성된 교육 과정과 수업 준비 그리고 사랑의 말과 눈물도 그 빛을 대체할 수 없다. 그 빛을 전해주지 않고는 우리 제자들은 길을 잃을 것이요 거짓의 종노릇을 할 것이요 생명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 빛이 좋은 소식 곧 복음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소경과 유대인의 예수님에 대한 대조적인 모습이 나온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소경은 비록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다. 반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스스로 모세의 제자라는 교만에 빠져 오히려 참된 빛에 대해서는 소경이 된다. 소경의 어둠이 빛의 통로가 된 것이다. 이 사건에는 또 다른 등장인물이 있는데 바로 소경의 부모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들의 눈을 뜨게 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출교가 두려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 못한다. 즉 빛을 알고서 고백하는 사람, 알지만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교만에 빠져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요한복음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교실에서 서 있는 나에게서 그 중의 한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봤다고 해서 당장 우리가 어둠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울의 이 고백 속에서 어둠과 빛 속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가 온전한 부활체를 입기 전까지 이 고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늘 교실에 앉아 기도해야 할 이유이다.


빛을 드러내는 교사, 어둠을 드러내는 교사


 어두운 길을 손전등을 들고 걷다 보면 정신은 빛이 비추는 곳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 걷게 된다. 세상의 빛이 밝을수록 자신의 내면의 어둠(죄)을 잊기 쉽다. 학생들의 삶과 관련을 맺지 못하는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는 세상의 빛을 드러내는 교사가 되기 쉽다. 그러한 교사에게서 배운 학생은 지식을 삶과 분리시키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며 지식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런 학생에게는 교사도 지식을 습득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고액을 들여서라도 좋은 학원을 찾아가는 것은 좋은 학습 도구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좋은 도구로서의 강의는 명료해야 되며 의심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요점이 분명해야 하고 특히 문제의 정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런 교사들이 소위 수업을 잘하는 교사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교사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대답’을 잘한다.

 반면 세상의 빛보다는 내면의 어둠을 드러내는 교사가 있다. 어둠을 드러내는 것은 무지를 자각시키는 것이며 죄의 끈에 묶여 있는 자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어둠을 드러내는 교사에게서 배운 학생들은 지식과 자신의 삶을 분리할 수 없다. 무지와 죄는 너무나 불편한 문제여서 당사자로 하여금 강한 탈출의 의지를 부여한다. 어둠을 드러내는 교사는 자신이 전달하는 지식이 자신의 삶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어둠은 먼저 교사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것이다.

 교육의 성공은 서울대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제자가 되지 않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의 실패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스승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이다. 발걸음을 십자가로 향해 나란히 걷는 길이다. 결국 멍에를 함께 짊어질 동역자를 찾는 과정이다. 세상의 빛으로 이끄는 교사와 깊은 어둠에 갇힌 영혼을 참된 빛으로 인도하는 교사의 교육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가르침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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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빛을 드러내는 교사

① 빛을 드러내기 → ② 빛을 습득하기 → ③ 교사와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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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단계 : 교사는 지식으로 세상을 잘 이해하고 욕망을 채울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돕는다.

② 단계: 교사에게 배운 지식으로 자신의 욕망(지적 욕구, 진학, 취직 등)을 채운다.

③ 단계: 일단 욕망이 채워지면 교사와 분리된다. 제자로 남더라도 그것은 세상의 빛 가운데 함께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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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어둠을 드러내는 교사

① 어둠을 드러내기 → ② 어둠을 자각하기 → ③ (불완전한 형태이지만)빛을 전달하기

→ ④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하기 → ⑤ 함께 동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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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단계 : 교사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여전히 세상의 빛에 속하기를 고집하거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어둠을 발견한다.

② 단계 : 자신이 지금까지 어둠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괴로워하는 동시에

            해결책을 찾기 위해 방황하게 된다.

③ 단계 : 교사가 전해 주는 빛을 흐릿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어둠(죄)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④ 단계 : 교사의 삶과 지식을 추구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제자가 된다.

⑤ 단계 : 학생들은 교사의 삶과 지식이 빛이 아니라 빛을 반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황하며

            교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참된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교사와 제자들은 동역자가 된다.


질문을 주는 교사

 이러한 교사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질문’을 잘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의 손에 든 교과서를 당신은 질문으로 가르치며 학생들은 질문으로 배우는가? 당신 안에 있는 어둠을 드러내고 그 어둠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마음속의 어둠은 우리를 살리는 어둠이다. 이 사실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불편한 진리’도 진리다. 어둠을 전하는 교사의 가르침은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폐기될 수험생들의 문제집 같은 것이 아니다.

 교사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것은 대답을 잘하는 학생을 길러 내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잘 하는 학생을 길러 내는 것이다. 질문은 자발성에 근거하며 전인격을 사용하는 일이다. 자 ! 학생들에게 대답을 주는 교사가 아닌 질문을 주는 교사가 되자. 기독 교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아이러니며 신비며 가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가르친 학생들 인생의 핵심적인 화두(話頭)가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자를 길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그의 달려갈 길을 갈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