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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역사와 현실, 그리고 하나님의 뜻(2014.08)

좋은교사 2014. 9. 5. 17:27

정병오 칼럼

역사와 현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비록 자진사퇴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지난 6월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역사 인식 논란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3년 전 온누리 교회에서 했다는 특강 내용은 많은 기독교인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인식일 뿐 아니라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그의 글을 읽었을 때는 문제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다만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해되고 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언제든지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창극 후보의 글을 통해 그 동안 내가 역사와 섭리,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 가지고 있던 생각 가운데 잘못되었거나 위험했던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히 아는 것과 다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우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섭리의 내용과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에 비추어 그 역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추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내 생각과 감정 혹은 정치적인 성향을 반영하기가 쉽기 때문에 극히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를 이야기 할 때는 혹 내가 그 말을 내 신념의 확실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거나, 맹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뜻에 관한 깨달음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가급적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영적인 비밀로 간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선으로 좁혀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 근현대사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고, 크고 작은 사건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그의 뜻이 있다는 문 후보자의 믿음이나 역사관 자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 사건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문후보자 개인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깊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것은 게으르고 전근대적인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화하라는 것이고, 분단은 공산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한국전쟁은 미국을 한국에 깊이 개입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러한 해석은 그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 반공주의, 친미주의 라는 문후보자의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표현을 한 것이다. 물론 그가 역사와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교회의 공적인 모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판단된다.

 

윤치호와 김교신

그렇다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떻게 역사를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이나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나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면서 세상 역사에 대해서는 방관자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다시 역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문 후보자가 그의 강연에서 두 번이나 언급한 윤치호의 경우 혼란했던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던 중 기독교를 만나 회심을 한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와 선진 서구 문명을 일치시켰다. 그러다 보니 서구 문명 자체가 절대적 기준이 되었고, 이 기준에서 볼 때 일본 강점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윤치호는 적극적인 친일의 선봉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자살을 한다.

반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교신은 역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던 중 기독교를 만나 회심을 했다. 그 역시 기독교가 기반이 된 선진 서구 문명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 역시 복음의 진리 하에 상대화시켰다. 대신 그는 조선이라는 이 어두운 역사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 재림이라는 기독교 진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래서 복음의 빛 아래서 영원할 것 같은 일제의 권력도 상대화시키고, 화려해 보이는 서구의 선진 문명도 상대화시키면서, 오직 조선이라는 이 어두운 현실을 살아가는 복음의 영원성을 접목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영원의 빛 아래서 이 땅을 살아가기

1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역사를 돌아볼 때 같은 복음 위에서 조선의 미래를 찾고자 했던 윤치호와 김교신의 행동과 그 행동의 기저에 있는 신앙과 역사관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조선 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상황과 서구 선진 문명의 격차를 생각할 때, 그리고 도무지 망할 것 같지 않던 일본 제국주의의 힘과 지리멸렬했던 독립운동 진영의 힘의 차이를 생각할 때 이 모든 현실을 복음의 진리 하에서 상대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육신을 입고 시공간의 한계 내에서 사는 인간은 그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력과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모든 정사와 권세를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 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진 한계를 늘 인식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의 빛 아래서 이 땅의 현실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문후보자 논란이 한국 교회에 남긴 과제

문 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은 한국 기독교 내에도 상당한 파문을 던졌다. 한국 교회 내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는 일련의 목회자 그룹과 신학자들 가운데 문후보자의 역사관이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찬성을 하기도 했고, 또 다른 그룹에서는 문후보자의 역사관은 성경을 빙자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반박을 펴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 교회가 좀 더 많은 논의를 통해 정리를 할 필요가 있는 매우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나는 이번 문후보자의 역사관 논란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이 시기에 문후보자의 역사관이 드러나게 하셨을까그리고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을 쉽게 단정해버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겠지만 한국 교회가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분단이라는 정치적 현실, 극단적 자본 중심의 경제 현실,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사회 현실을 복음의 능력으로 상대화시키지 못하고,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를 그대로 교회 가운데 수용하고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적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 사건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그냥 넘겨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이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져준 과제를 심각하게 붙들고 되씹어야 할 것이다. 이 사건 역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믿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국 교회와 기독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공론의 장을 통해 심도 깊은 논의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쪹윤치호와 김교신과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는 분은 양현혜 교수님의 <윤치호와 김교신>(도서출판 한울), <김교신의 철학>(이화여대 출판부)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