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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가르침의 폭력



행복 수업 초등 이야기
가르침의 폭력

문 경 민 (행복한수업만들기 초등 모임 사무국장)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결정들을 보면 가슴이 쓰릴 때가 종종 있다. 유성 기업 사태를 둘러싼 비상식적인 태도가 그러하고, 등록금에 짓눌려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연행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인 ‘나’에게도 비상식적인 모습이 있다.

 2년차 때였을 것이다. 1년 내내 수업 시간에 분노를 격발했던 것이. 그때의 나는 걸핏하면 분필을 칠판에 짓이기거나 책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으로 나의 수업을 존중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수업 시간에 고함을 지르는 일은 늘 있는 일이었고, 너무 고함을 질러대서 목이 쉬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수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 보아도 낯이 뜨겁다. 수업에 대한 나의 게으름과 무식함은 회색 양심 뒤에 감춰 두고 수업을 흐트러뜨리는 아이들에게 화를 격발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많은 아이들에게 잘못을 저지르면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현재의 나는 과거 보다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습 뒤에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다.


폭력적인 수업

 교실에서의 폭력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의 수업 내용과 방법에서도 폭력이 숨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이들을 갇힌 틀 속에 앉혀 놓고 똑같은 문제에 똑같은 정답만을 강요하는 학습 상황도 폭력이라 볼 수 있고, 아이들을 평가 결과로 재단하여 동일한 행동 양식을 나타내는 아이들만 칭찬받는 교실의 문화를 구축하는 것도 폭력이라 볼 수 있다. 창조 세계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지식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교육의 체제 또한 폭력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어쩌면 선한 의지를 품고 아이들 앞에 서는 우리들도 구조적인 폭력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이들 앞에서 강압의 퍼포먼스를 펼쳐 갈 때가 있다. 아이들에게 나의 가치관과 사고 체계를 주입하기 위해 다양한 수업 장치와 프로그램을 대단원의 수업 흐름 가운데 배치시키고, 아이들이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속상해 한다. 기독교적인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나의 수업에서 구현하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기울여 왔지만, 아이들과 나의 관계는 상당히 수직적이었고 나의 가르침은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아이들에게 쏟아 부을 것들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서 그 밑에 있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인격과 삶의 배경에는 깊은 관심을 쏟지 못했다.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아이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은 나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쏟아 붇고 싶어 하는 성급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 마음에만 합했던 혜영이

 작년에 정말 내 마음에 흡족한 학생을 만났다. 우리 반 여학생이었고 그 아이의 글을 통해서 나는 내가 가르친 것이 그 아이의 마음에 분명한 잔상을 남겼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의 동지들에게 그 아이의 공책을 가져와 자랑하곤 했다. 그 아이의 글에는 내가 원하는 높은 수준의 사고력이 진리와 합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모습도,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성실한 것도 내 마음에 합하였다. 심지어는 나와 비슷하게 수학을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혜영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혜영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별 부담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혜영이도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영이는 그러지 않았다. 2학기를 훌쩍 넘긴 10월이 될 즈음, 나는 답답함과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혜영이를 연구실로 불렀다.

 “….”

 아무 말이 없는 혜영이에게 나는 물었다.

 “혜영아, 너는 선생님이 싫으니?”

 역시 대답이 없다. 대답을 하라는 나의 독촉에 혜영이는 조용히 고개만 가로 저었다. 저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어째서, 혜영이는 어째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내가 가르치는 것들을 공책에 또박또박 투영해 내던 녀석이, 어째서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침묵과 질문, 고갯짓이 오가는 어눌한 대화가 30분을 넘겼고, 그날 혜영이와 나는 아무 것도 이루어 내지 못했다. 화를 내든지, 서로 미워하든지, 아니면 오해를 풀든지. 어떤 방향으로든 이야기의 결론이 났어야 할 것 같은데, 혜영이와 나의 대화는 벽을 마주한 채로 끝났다. 어떤 균열도 없었다. 대화는 실패로 끝났고,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사물놀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장구채를 쥐고 있는 혜영이의 몸짓은 강한 소리를 타고 역동적으로 움직였고, 가락에 맞추어 도리질하던 머리칼의 리듬은 어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폭발하는 장단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몸짓으로 고함을 지르던 혜영이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아쉽게도, 나에겐 낯선 것이었다. 혜영이가 열정을 보이는 세계에 나는 없었다. 나는 사물놀이를 몰랐다. 사물놀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경이로움에 대해 느껴 본 적도 없었다. 혜영이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나는 그 아이와 함께 나눌 경험도, 공감대도 갖고 있지 못했다.

 휭. 가슴에 찬바람이 이는 순간, 그때서야 비로소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애초부터 혜영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던 거다. 성별이 달랐고, 관심 있는 것도 달랐다. 나는 그 아이의 학습 결과물이 흡족했기 때문에 혜영이를 좋아했던 것뿐이다. 나는 혜영이에 대해서 몰랐고, 어린 그 아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혜영이는 내가 배치한 수업의 장식들과 대단원 흐름의 의도를 다 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퍼포먼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아이는 그 모든 프로그램들의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빤한 연극을 볼 때의 식상함을, 그 아이는 반복되는 내 수업을 통해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지식의 눈부심에 마음을 빼앗겨,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데에만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이 어떠하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건 괘념치 아니하고 나는 나의 입장을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불길한 마음이 일렁거린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 나갈 능력이 있는데, 나는 그 능력과 삶의 다양함을 무시하고 나의 입장만이 고결하고 가치 있는 것인 양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입시 제도처럼 무지막지한 폭압의 기제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수업에도 폭력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내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면서도 내게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았던 혜영이는, 어쩌면 강요되는 나의 신념에 지루함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나의 인격이 부딪히고 어우러져 하나의 하모니가 수업의 공간 가운데 펼쳐지는 것을 꿈꾼다. 가르침의 씨줄과 배움의 날줄이 엮여 아름다운 지식의 향연이 펼쳐지는 수업을 생각한다.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얼굴의 씰룩거림만 느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지식의 향연. 그런 수업에 대한 높은 그림을 그리다가, 그것이 예배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적인 수업이란 그런 것일 거다.

 ‘향연’, 그것을 향한 우리 모두의 한 걸음이 오늘에도 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