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나고 싶었습니다

기독교 생태계의 회복(양희송 청어람 ARMC 대표_2017.10)

 

 

 

 

 

기독교 생태계의 회복

 

 

 

 

 

 

 

인터뷰 임종화 사진 김만호

 

 

 

 

양희송(청어람 ARMC 대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리스틀의 트리니티 칼리지(B.A.)와 런던 신학교(M.A.)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월간 복음과 상황편집장을 지냈고, 2005년부터 청어람 ARMC의 대표로 있으면서 인문학, 정치사회, 문화예술 등의 대중 강좌를 기획·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시 프로테스탄트(복있는사람),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포이에마), 이매진 주빌리(메디치미디어)가 있다.

 

 

10월 마지막 주일인 29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매년 무심히 지나가곤 했는데 올해는 조금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억한다는 것은 500년 전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종교개혁의 의미를 묻기 위해 양희송 청어람 ARMC 대표를 만났습니다.

 

 

대표님은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간단하게 사역 소개 부탁드립니다.

가끔 제 아들도 물어봐요.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웃음). 그럴 때 제가 공식적으로 준비한 대답은 복음주의 운동가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대의에 필요한 것은 다 한다고 답변하죠.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영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돌아와서는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2, 복음과 상황편집장으로 2년 일했고 2005년부터 청어람 아카데미’(현재 청어람 ARMC)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한 청어람 ARMC’가 주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다양한 강좌를 기획하고, 개인적으로는 글도 쓰고, 강의도 합니다. 목회나 교회 내 사역보다는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 운동,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해 공부도 하고 활동도 조직하는 등 복음주의 연합 운동의 장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어람 ARMC가 주요 사역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시작하게 된 계기와 활동 목표, 활동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청어람 ARMC(Academy, Research, Mission & Movement, Communications)는 월간 복음과 상황이 힘들어지면서 대안 마련을 위해 김동호 목사님을 찾아가서 교회가 새로 마련한 교육관 활용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했는데 직접 운영해 보라고 하셔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공간을 운영하는 역할이었는데 내용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아카데미를 시작하게 되었고 인문사회, 문화예술, 정치, 글쓰기, 소셜 미디어, 영상과 같은 실용적 영역과, 신학 등에 대한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여 진행해 왔습니다. 교회 목회 분야보다는 주로 교회로부터 세상 밖으로 향하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고, 교회 경계선상에 계신 분, 교회를 떠난 분, 비기독교인을 향해 기독교인들은 무슨 고민을 하나에 응답하는 강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대표님께서는 다시 프로테스탄트책도 쓰셨는데 이 시대 한국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독일은 루터가 있으니까 특별하겠지만, 다른 나라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요란스럽게 기념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경우 교회가 개혁의 동력이나 자극이 필요하기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더 간절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하면 마틴 루터를 생각하고 이신칭의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교회 내부, 교회 개혁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영역으로 구분하여 그 중 한 영역으로서의 교회 개혁을 이야기하는데, 500년 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있었고 그 위에 종교가 있었습니다. 곧 당시 종교개혁은 일상 전체를 건드리는 담론이었던 거죠. 우리는 그것을 교회 내부의 관심사로 축소하는데 500년 전의 규모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교회사 측면에서 말고 서양사라는 폭넓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종교개혁 담론이 교회 내부에 머물지 말고 기독교를 통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변화를 제공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넘어 사회 전체 개혁을 이야기하셨는데 먼저 교회가 건강하게 회복되어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마틴 루터가 초기에 썼던 종교개혁 3대 문헌 중 하나인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문건을 보면 만인제사장이야기가 나옵니다. 중세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개혁의 필요에 대해 공감했지만 누가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제들이 각성하고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루터는 당시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그 사람들만 신부, 사제가 아니고 모든 성도가 사제고 제사장이다.’ 라고 선언하며 평신도들을 개혁의 주체로 불러내었고 그 신학적 근거가 만인제사장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개혁되기 전에는 사회에 대해 말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세월에 제도 교회가 자체적으로 개혁되겠습니까? 세상 곳곳에 들어가 있는 평신도들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 발언하고 변화를 만들면 그 변화를 통해 해당 영역 뿐 아니라 교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원리를 이 시대에 적용해 보면 교회 문제와 함께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조정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다시 프로테스탄트를 보면 현재 교회 문제를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다시 프로테스탄트를 쓴 취지가 한국 교회의 문제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목회자가 주된 문제가 되는 성직주의’, 커지려고 하는 욕망이 나타나는 성장주의’, 교회가 세상을 대할 때 등장하는 승리주의적 태도로 포착, 정리 되었습니다. 이 구조가 낯설지 않아서 연구해 보니 종교개혁 시기에도 유사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 교회의 문제를 보다가 종교개혁을 만나게 된 거죠.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태도는 한국 교회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나 튀어나올 수 있는, 늘 조심해야 하는 요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을 공부하다 보면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교회를 향해 시도한 개혁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과감하고 과격한 조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개혁에 대해 잘 안 될 거야. 힘들어. 변하겠어?’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중세 시대에는 더 거대한 체제 안에 있었지만 상상력이나 패기가 지금보다 훨씬 대단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이후에 2014년에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책을 통해 가나안 성도에 주목하셨는데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가나안 성도라는 용어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유용한 개념입니다. 가나안 성도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떠나 교회 밖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이들은 한국 교회 상황을 비춰주는 반면교사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와 약점은 가나안 성도들의 이야기를 통해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일방적인 희생자, 피해자로 보는 것도 적절치 않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힘들게 떠난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당하게 이것은 교회일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지 않아.’라며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나온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한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 측면 뿐 아니라 한국 교회가 탐색하지 못했던 교회론, 구원론, 기독교 신앙 그 자체에 대해 심층적으로 질문하며 탐색해 가는 여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출간 이후의 반응과 예상하신 움직임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초기에는 가나안 성도들도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떠난 사건을 개인적인 사건으로 여기고 조용히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초기 강의는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식 전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면 주변에 가나안 성도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생활이 당연한 것인데 일탈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가나안 성도를 인터뷰해 보면 자기 주위에는 가나안 성도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예전에 열심히 신앙 생활했던 사람들이 다 교회 밖에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이들이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니더라는 겁니다. 이처럼 목회자 그룹이 가나안 성도에 대해 잃어버린 양, 돌아올 탕자라는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가나안 성도 자신은 쇼생크탈출, 탈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이 둘 사이에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인식의 격차가 큽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인식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 가나안 성도 이야기를 서사와 데이터를 통해 객관화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책을 쓸 때는 가나안 성도를 100만 명 정도로 추정했는데 지금은 200만 명까지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규모라면 이런 현상은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공적인 사건이고 사회적 현상인 거죠.

최근에는 인식의 변화를 넘어 교회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에게 신학, 사회적 실천, 영성적 추구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제공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년 사이에 가나안 성도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있고, 가나안 성도 본인도 혼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재감과 역할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사회적 영성의 실천 과정에서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섬기는 장이 몇 년 사이에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사회적 영역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 가나안 성도 논의가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부터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꾸준히 해 오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도 대안적인 형태 중 하나인가요?

세속성자 수요모임은 상·하반기 학기 중에 12주간 성경의 책 하나를 정해놓고 강해설교와 토론을 하며 예배드리는 모임으로 5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교회 개념은 아니고 예배만 드립니다. 개인의 선택권을 많이 주는 방식인데 5년 정도 되니 고정 멤버도 생기고 가족들이 같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 학기마다 새로운 얼굴도 보입니다. 전통적 지역 교회는 아니지만 가나안 성도들이 일정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편하게 모일 수 있는 장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근거는 없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교회의 상황이 개선되면 가나안 성도의 70~80%는 교회나 신앙 공동체로 복귀할 의사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개혁 운동이나 대안 목회, 작은 교회 운동 등이 의미 있는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30%는 현재 제출되는 답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신앙적 순례를 지속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을 기존의 제도로 엮기보다는 자유를 인정하면서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 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에서 새로운 기독교 생태계를 대안으로 제안하셨는데 내용이 궁금합니다.

보통 대안을 이야기하면 교회 개혁을 말하고, 이를 위해서 개혁적인 좋은 교회들이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죠. 저는 한국 교회의 문제가 공룡이 되어서 생긴 문제공룡이 되지 못해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곧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모두 공룡처럼 되고 싶은 열망은 동전의 양면일 수 있습니다. 순환 논리일 수 있지만 교회가 덩치를 키우지 않더라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것을 생태계개념에서 찾았습니다. 생태계는 다양한 구성요소가 협력하여 전체를 구성합니다. 심지어 공룡조차도 생태계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도 저마다 공룡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생태계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인지하고 그 역할을 하는 그림이 되어야 건강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 중심의 교계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는 일부 목회자에게 과도한 대표성을 부여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문제를 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좋은교사운동, 기독변호사회, 기독의사회 등 각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 전문인들이 그들의 영역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인식의 폭을 좁게 교계로만 잡지 말고 개신교 생태계로 인식하고 상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신교 생태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저는 개신교 생태계를 지식 생태계, 교회 생태계, 시민 생태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생태계는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고 공생할 것인가, 시민 생태계는 개신교 바깥 세계인 시민 사회와 어떻게 호흡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식 생태계가 있는데 현재 이 영역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 생태계가 활성화되어 지식이 생산·가공되고 유통·확산되어야 우리의 생각이 공유될 수 있습니다. 지금 개신교 지식 생태계는 지식 생산이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고, 제대로 가공·유통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쪽의 담론이 저쪽에 영향을 못 미치고 동맥 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죠.

개혁은 핵심 아이디어가 왜곡 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을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경우도 인쇄술의 발달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인쇄되어 왜곡 없이 유럽의 끝까지 전달될 수 있었던 거죠.

그런 차원에서 지금 개신교 안에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묻게 됩니다. 카톡 등을 통해 오염된 정보는 잘 돌아다니는데 중요한 지식의 생산과 유통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어람 ARMC는 지식 생태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역이 활성화되고 플랫폼이 만들어져 지식이 교류되고 유통되는 장이 확보되면 좋겠습니다.

 

개신교 생태계를 말씀하셨지만 교회의 위기와 함께 기독 NGO도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90년대 이후 기독 시민 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자기 분야에서 끊임없이 지적 자원이 공급되어야 성장할 수 있는데 운동을 이끌어 갈 지적 자원이 고갈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386세대가 민주화 운동은 잘 했지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는 전문성이 부족하고 지적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도 지적 자원이 바닥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개신교 지식 생태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크다고 자랑하고 덩치에 맞게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지만 이것을 뒷받침할 지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위에 걸맞은 사회적 존경과 전문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권위와 힘,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적 결핍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채워가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가 빨리 다음 세대를 바라볼 수 있는 지적 자원, 시각, 내용, 관점, 신학적인 배경을 단단하게 다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올해 매달 종교개혁 500주년 기도회를 하고 계시는데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작년 이맘때부터 이만열 교수님 등 몇 분이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학술대회, 기념행사 정도로 끝낼 수 없지 않느냐, 한국 교회 개혁과 관련한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주셔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연합 기도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연합 기도회를 준비하게 된 이유는 먼저 기독 시민 운동,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여러 주체가 서로를 잘 모른다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80~90년대에는 대형 연합집회를 통해 정서적으로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복음, 민족, 역사, 성서한국과 같은 구호들이 세대적 집단 정서를 구성하면서 시대 의식, 사회 의식, 신앙인으로서의 문제 의식에 대한 공감대를 확보했는데 지금은 서로 얼굴도 모르고 의제를 공유하는 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연합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의제를 공유하고 기도하며 복음주의 운동 주체들 간의 동질적 경험의 장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복음주의 운동 역사로부터 배운 것인데 복음주의 운동은 초교파 연합 운동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를 지탱해왔던 내부 구조가 세대교체 되면서 제대로 성능 발휘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초교파 연합 운동은 축소, 왜소화되고 개별 교회나 그룹의 이해관계가 두드러지게 되었죠. 이렇게 안 되려면 연합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올해 연합 기도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생태계에 좋은교사운동도 포함될 수 있는데 좋은교사운동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먼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교육영역에서 연합 운동의 틀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학법 개정 당시 좋은교사운동을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교계의 이해관계와 안면에 끌려가지 않고 학생들의 입장을 더 많이 고려한 주체적 판단으로 개신교 내부에 찬반양론, 입장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과 토론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교사운동이 공교육 문제를 중요한 운동의 목표로 두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공익이라는 영역이 소멸, 훼손되고 있는데 좋은교사운동이 공교육을 기반으로 운동을 꾸준히 해 온 것이 의미있어요. 공공 영역에서 싸우고 희생한 것이 있어야 그 다음 상황에서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운동 내부에서 이러한 활동을 신앙적으로 잘 설명해 낼 수 있는 근거도 갖추어 나갈 필요도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좋은교사운동이 교회와 교회 교육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사 운동이 교회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고 부문 운동에 충실한 것이 맞지요. 그러나 한 시대의 교회가 위기를 맞았을 때, 스스로 헤쳐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도원 운동이나, 신앙 운동 대부분이 바깥으로부터 등장한 운동이었습니다. 교회가 외부의 자극과 성과를 내면화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갔던 것처럼, 지금 교회 교육의 위기 상황을 학교 교육에서 준비된 교사들의 역량, 아이디어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좋은교사운동이 장기적으로 교회 교육을 떠맡을 필요는 없지만 한시적으로 특별 부문 운동이나 프로젝트 개념으로 교회 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양희송 대표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시대 종교개혁의 의미와 좋은교사운동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교육 영역에서 교육의 회복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회복과 무관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