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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대구에서 풀어내는 행복 수업 이야기

대구에서 풀어내는 행복 수업 이야기

 

박소형 (행복한 수업 만들기 대구 모임, 대구 인지초)

 

‘2010 기독교사대회’ 문화와 만남 시간에 초등 행복한 수업 만들기 강의실에서 4명의 선생님들이 만났다. 대구 지역이라고 모였지만, 실상은 대구, 거창, 포항…. 뭔가 안 될 것 같은 구성원들이 모여서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문경민 선생님이 지역 모임을 만들어서 연락할 사람을 정하면 연락처를 내고 날짜를 정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미적거리고 있는데 거창에서 근무하면서도 대구에 매주 오겠다는 열의를 보인 김상일 선생님이 물꼬를 터 주었다. 김상일 선생님은 기독교 세계관을 정리해 주면서 처음 모임의 방향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이 길이 얼마나 큰 축복이자 부담인지 감도 못 잡고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두 명의 자매 김현정, 김신정 선생님. 배우면 뒤돌아보지 않고 실천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김현정 선생님의 추진력은 과히 남달랐고, 그 행동파 이면에는 모임의 기도 부장으로 낮은 곳에서 섬기는 동생 김신정 선생님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구 지역 단체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김혜리 선생님(2010년 졸업한 따끈따끈한 새내기)이 나와 이야기하던 중, 행복한 수업 모임에 관심을 보이더니 합류했다. 졸업과 동시에 기독교적인 수업에 대해 고민하는 새내기 교사가 있다는 건 정말 감동이었다. 한참 대구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갑자기 정말 부담스러웠던 마이크 돌리기가 시작되었데,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던가 보다. 행복한 수업 대구 모임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말에 김민영 선생님이 곧바로 합류했다. 김 샘은 모임의 연구 부장(?)이 되어 단원 재구성에서 기독교적인 부분과 복음에 대해 늘 일침을 주는 귀한 동역자가 되었다.

첫 모임 하는 날 허현, 박영주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허현 선생님은 카페에 주옥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허현 선생님의 모임 후기 글을 읽고 나면 모임에 대한 생각이 다시 체계가 잡힐 정도니 허현 선생님에겐 글을 통한 소통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 그 옆에는 늘 내조의 여왕 박영주 선생님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코트 깃 세워 주고, 옷 털어 주면서 금슬을 과시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4명이 시작해서, 대구에서 첫 모임을 8명으로 출발하게 되었으니, 이 자리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

중반부터 같이하게 된 거창 전기환 선생님. 깊이가 있으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면이 단원 재구성과 복음과 삶 속에서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4년차 교사인 윤은희 선생님. 아이들을 위한 일은 누가 뭐래도 신앙 안에서 철저히 헌신하고 순종하기를 원하며 이 길에 동참하고 있다.

작년 가을, 놀라운 일이 대구에서 일어났고 그 꿈틀거리는 불씨가 지펴 낸 일들을 허현 선생님이 글로 풀어낸 바 있다.

10월 16일 모임에서는 직접적인 복음 제시의 필요성과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재구성한 수업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이 토론의 결론으로 연구 부장과 기도 부장을 세워 우리 모임과 수업에서 나침반이 되는 기독성과 복음을 늘 점검 받기로 했다.

10월 23일에는 실제 국어 과목을 통해 대단원을 재구성해 보는 연습을 해 보았다. 많이 허술한 단원 재구성이었지만, 이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교과와 단원에 대해서도 재구성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시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12월호 78~79쪽을 보세요.)

  대구 행복한 수업 만들기 모임 풍경

- 11월 6일 수학의 재구성

 

김상일 선생님이 5학년 2학기 수학 ‘대칭’ 단원을 재구성한 것을 발제한 날이었다. 준비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점대칭 도형과 점대칭 위치에 있는 도형을 찾기가 어렵다고 토로하신다. 샛별초등학교는 수학의 경우 연 차시 수업이 가능하고 이때는 다른 반 선생님이 보조로 들어오기에 조금은 낫다고 한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면 완전 학습을 이룰 것인가, 진도를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수학의 개념을 형성시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발제 후에 다양한 주제로 나눔이 이어졌다. 첫 번째가 수준차가 나는 아이들(그중에서도 부진아)에 대한 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진도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막막함이 있고, 개별 지도의 어려움 때문에 묻혀 가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공책에 필기할 때 교과서에 언제나 나오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에 대한 답을 글이든, 그림이든, 수직선이든 꼭 쓰게 하고 교사가 철저하게 점검한다면 조금은 향상이 나타난다는 의견이 있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수학을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침에 문장제 문제를 한 문제 내고 매일 풀게 한다는 것이었다.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매일 한다면 수학의 감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수학의 머리가 트인다고 해야 하나? 그 트이는 시기가 수준차가 있기에 열심히 해도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 되지 않는 아이들의 좌절감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수학 용어를 먼저 확실히 할 필요가 있음도 나왔다. 아이들과 ‘진분수’, ‘가분수’, ‘대분수’의 정확한 뜻부터 국어사전을 통해 찾고 학습하니 좋은 점이 있다고 했다. 또래 교사를 활용할 때도 지혜가 필요하다. 수준차가 나는 또래 교사가 아니라 비슷한 수준의 학급 친구(짝꿍이 아닐 수도 있음)가 또래 교사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자존심의 상처도 받지 않고 더 잘한다는 의견이었다.

수학 교육의 방향으로는 문제를 풀고 정답을 찾는 수학에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 수학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철학과 연결한 수리 글쓰기(수학 일기) 블로그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수학을 기독교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의견도 나왔다. 현재까지 재구성된 것을 찾아보아도 다른 교과에 비해 많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재구성하기 어려운 교과나 단원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단원은 재구성하고 어떤 단원은 그냥 가르치면 괜찮은가’ 하는 것이었다.

또래 교사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었던 생각은 같은 아이라도 수준차가 나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예수님의 성육신이 생각났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이 되셨고 더구나 귀족이나 왕족, 부자가 아닌 천하고 가난한 사람의 아기로 오셨기에, 사람들이 자신과 같다고 공감하고 그 앞에 나오는 것이 쉬울 것 같다. 나는 주님처럼 성육신의 낮아짐으로 아이들 앞에 서고 있을까? 수학이 80점인 아이는 80점이 아니라 받지 못한 20점 때문에 좌절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며 나 또한 내 자신이나 아이들을 바라보며 많은 부분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잘 찾고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할 것이 많음에도 감사보다 불평이 많은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주님처럼 낮아지고 감사함이 가득하다면 행복한 수업의 첫걸음이 될 것임을 다시 기억나게 하는 시간이었다.

영화 〈돼지가 있는 교실〉

 12월 4일은 2010년 행복한 수업 만들기 대구 모임의 마지막 모임이었다. 전기환 선생님이 국어 다섯째 마당을 재구성했다. 영화 〈돼지가 있는 교실〉을 사용하여 토론을 통해 문제와 해결책을 찾아가는 수업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학교의 사정상 선생님이 2개 반 수업을 하는데 한 반은 영화 중간에 끊고 토론하고 투표를 하니 찬반이 정확히 반반이었고, 다른 반은 다 보고 토론하고 투표한 결과 한쪽이 우세하게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나눔에서 많이 나온 이야기는 첫째, 다름과 틀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다원주의까지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래도 모아진 의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둘째로는 기다림이다. 교사가 어느 순간에 개입을 해야 적절한가 하는 것이다. 기다림은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결론을 내려 주는 적절한 시간이다.

 학기말이라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쓰려니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생각의 조각만 몇 개 떠오른다. 예수님의 카리스마는 참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사야 53장에도 보면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런 분이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야기는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고 압도하는 겸손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는 것일까? 선한 카리스마? 악한 카리스마? 어떤 이야기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내년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대구 모임에 오래 기억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