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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어둠의 교사 VS 빛의 교사


 

양영기의 교실 묵상 6

어둠의 교사 vs 빛의 교사 #1



學文 또는 學問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것을 ‘학문’이라고 한다. 용례로 ‘학문에 힘쓰다’, ‘학문을 닦다’가 있다. 그렇다면 이때 사용되는 학문에 대응하는 한자는 學文일까? 아니면 學問일까? 답은 學文이 아닌 學問이다. 학문과 비슷한 낱말로 공부(工夫)가 있다. 공부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말한다. 글(文)을 배우는(學) 것이니 學文이 맞을 것 같은데 의외로 답은 學問이다. 學問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배울 학(學)에 물을 문(問)이니 학문은 ‘묻는 것을 배운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질문하는 법을 배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결국 학생이나 교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험지 문항의 정답만을 찾기 위한 공부는 참된 공부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공부’가 아닌 ‘대답하는 법을 배우는 공부’이다.

위대한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많은 스승들은 질문하는 것에 통달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화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폴레마르코스에게 질문을 던지며 안개 낀 개념의 바다 위에서 정의의 본질을 향해 쫀쫀한 항해를 한다. 소크라테스의 계속되는 질문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안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긴장감과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오직 ‘나태’와 ‘교만’의 닻을 마음의 밑바닥에 내린 사람만이 그러한 혼란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며 정박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정박한 곳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정체된다. 더 나아가 그 정체가 지속될수록 고집의 무게가 더해져 아무도 그 사람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낡은 지식의 토박이가 되어 편견의 마을에 스스로를 가둔다.

한편,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트라시마코스가 끼어든다.

“이거 원, 대체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거요! 내 귀에는 당신들 얘기가 말장난처럼 들릴 뿐이오, 한쪽에서 질문하면 다른 한쪽에서 대답하고, 답변보다 질문이 더 쉽다는 것쯤은 상식이오. 소크라테스 선생! 진정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그런 말장난일랑 집어치우고 제대로 답변해 보시오. 도대체 정의가 뭐요?”

물론 트라시마코스의 흥분된 요구에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질문으로 맞선다. 트라시마코스의 말처럼 답변보다 질문이 더 쉬울까? 정말 이 말이 맞다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이름 대신 트라시마코스의 이름에 더 익숙해져 있을지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기술은 ‘산파술’로 알려져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의 대화 기술은 산모가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産婆)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지식의 출산을 돕는 지식의 산파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기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을 상대가 스스로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상대가 어떤 것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플라톤의 대화》의 《메논》편에서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에게 기하학을 가르치는 장면이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노예 소년을 한 명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그 소년은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소년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넓이가 2배가 되는 정사각형은 그 대각선으로 된 정사각형임’을 대답할 수 있도록 한다.

만일 우리에게도 소크라테스의 질문 기술이 있다면 우리 학급의 학습 부진아는 거의 없어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은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도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했으면 하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특유의 대화 방법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 있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대화의 결말 부분에서 스스로 모른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창의적인 학습 부진아’를 양산하는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교육 받은 학생들은 교사의 질문을 새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즉, 즉각적인 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이 함의하는 것을 고민하고 그 질문에 비추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 시험지를 받았을 때 학생은 답을 찾기보다는 머뭇거리며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 정답을 찾아 써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만일 우리 중에 실지로 이러한 교사가 있다면, 예상컨대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많은 항의를 받을지도 모른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처럼. 그래도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그 항의로 어떤 대한민국의 교사도 소크라테스처럼 사약을 받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 속에 담긴 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마10:34”


예수님의 검은 우리의 ‘무지’와 ‘죄’를 밝히는 검이다. 그분의 검은 우리가 잊고 살거나 부인했던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진 죄를 드러낸다. 그 결과 우리의 평화는 깨진다. 진리와 거짓이 나뉘고, 가장 가까운 혈연마저도 그 검 앞에서 원수가 된다. 진정한 평화는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위장된 평화를 깬다는 것이 얼마나 거북하며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복음을 전해 본 사람은 안다. 웃으며 지내던 그 지인이 어느 순간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스쳐지나 간다. 순간, 나는 음모를 들킨 것처럼 발가벗겨진다.

한편, 우리가 전해야 할 검 중의 하나가 ‘지옥’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서 모르거나 우습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지옥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마치 지나가는 한여름의 무더위쯤으로 취급하며 가면을 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옥이 자신들을 협박해 교회에 나오게 만들거나 헌금을 뜯어내기 위해 만들어 낸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의 얼굴에서 또는 우리의 손과 발에서 긴박성과 진정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가벼운 진리가 그들에게 결코 무겁고 진지하게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기독 교사들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한 해가 다가고 진급시킬 때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도 꿋꿋이 견뎌 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만나는 학생과 동료 교사들에 대한 구원의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롬10:14~17”



이기적인 공존(共存)


2009년에 〈2012〉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운명은 다가올 재앙 앞에 두 부류로 나뉜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2009년 한 박사가 인류에 종말을 가져올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한다. 또 다른 등장인물도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후, 쓰나미의 발생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G8 회원국들은 비밀리에 2012년에 발생할 대재앙을 대비할 계획을 비밀리에 세운다. 그 계획은 쓰나미를 막아 줄 방주(ARK)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는 까닭은 모든 인류를 그 방주에 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주에는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탑승하게 된다. 소수의 선택된 자들은 과학자, 대통령 등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방주의 탑승권을 10억 유로1)에 살 수 있는 40만 명이다. 마침내 2012년 어느 날 대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아비규환2)에 빠진다. 실감나는 CG로 브라질의 코르코바두 예수상, 시스티나 성당, 자금성 등이 붕괴되는 모습을 스크린에 펼치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세계 곳곳의 화산이 폭발하고 땅은 갈라져 사람들이 묻힌다. 쓰나미는 거대한 산들을 덮치고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에 잠겨 지도에서 사라진다. 쓰나미 직전 양심적인(?) 미국 대통령과 몇 명의 탑승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탑승을 거부하며 감동을 자아낸다. 마침내 쓰나미가 그치자 방주에 탄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지구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준비한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대재앙이 발생할 것을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 인류를 구할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과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폭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대재앙이 일어날 것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지키고 방주를 만들고 탑승 계획을 세운다. 대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은 한 공간에서 똑같은 생활인으로 살아간다. 다만 방주 탑승 권한이 있는 사람들은 그 ‘때’가 오면 자신은 구원 받을 것이며 자신의 이웃들은 구원 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그때가 올 때까지 조용하고 평화롭게 좋은 이웃이 되어 그들과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안전한 탑승만을 위한 이기적인 공존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지혜 없음으로 우리 이웃들(특별히 우리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최소한 전하지 못함에 대한 ‘부담감’까지 버리거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부담감을 언젠가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성령께서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가 될 것이다.

공교육에 있는 많은 기독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과장된 것이며 많은 경우 사탄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8:44)다. 물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디모데후서 말씀을 단순하게 적용해서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복음을 들이대다가 짧고 굵게 교직을 끝내라는 것은 아니다. 전도에 대한 소명으로서의 부담감을 늘 갖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지혜롭게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 소명은 우리가 교사든 아니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부여된 것이다.








1) 10억 유로는 2011년 2월19일 환율로 따지면 1,557,090,000,000원에 해당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천국을 돈으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2) 불교 용어인 아비규환은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아울러 부르는 말로 아비지옥은 한 겁(劫) 동안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는 지옥이고, 규환지옥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거나 뜨거운 불 속에 던져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울부짖는다는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