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수업 초등 이야기
무엇이 행복한 수업인가?
권일한
(행복한 수업 만들기 초등 모임 대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모습의 나라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다가오진 않았을 겁니다. 그 나라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곤 예수님밖에 없어 오해 없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비유뿐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 유대인들이 가진 오해(유대인이 이방인 모두를 굴복시키고 다스리는 날)처럼 하나님 나라 역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했겠지요.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이 다윗 시대처럼 강성해지는 나라를 꿈꾼 제자도 있을 겁니다.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커졌는지 보여 줍니다. 사람이 만들어 가려던 하나님 나라가 오히려 폭력과 살인, 무지와 편견, 기만과 방종에 몰두했던 걸 보게 됩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시도했습니다. 좋은 면도 있었지만 칼뱅의 오해였던 부분도 있습니다. 칼뱅은 자신이 정한 하나님 기준을 강압적으로 적용하여 58명을 처형하고(35명은 화형) 76명을 추방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강제로 억눌러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김두식 님은 교회가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진 모습을 안타깝게 소개합니다. 진보 교회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와 보수 교회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다른 까닭 역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 말씀도 알지 못해 크게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실 생각을 진보와 보수 교회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자유롭게 묵상할 입장이 아닙니다. 사사기 시대처럼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며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무리 속에 우리도 끼어 있습니다.
행수만 초등 모임 카페에 여러 자료가 올라옵니다. 지역 모임, 교과 모임, 학년 모임, 관심 영역 항목도 있어 생각도 나누고 자료도 나누고 정보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올라온 자료를 하나 골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좋은 교사에게 보여 주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① 참 좋은 수업이네요. 아이디어도 좋고 올바른 생각을 전하고 있네요.
② 공립 학교에서 이러시면 됩니까? 안 됩니다.
답은 ①번입니다. 가끔 ②번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①번을 보여 주되, ②번을 지향하는 게 우리 목표니까요.
카페에 올라오는 정보와 자료 하나로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들의 삶이 복음을 보여줄 터이고 기회를 만들어 복음을 꼭 전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겠지요.
그럼 이 자료를 보수와 진보 교회에 보여 주면 무어라 할까요? 아니, 이걸로 신문을 만들어 지하철 앞에서 뿌리면 사람들은 이 신문의 정체를 무엇이라 볼까요?
① 보수 교육 단체 활동
② 진보 교육 단체 활동
③ 기독교에 물든 사람들의 이상한 단체 활동
답은 ②번입니다. 진보라 함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보일 ‘공평’, ‘평화’, ‘공동체’를 실제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일이죠. 선생님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모습일 거라 생각하며, 교실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목표로 삼은 수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린 결론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문제는 없을까요? 대다수가 가지 않는 길이 옳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소수여서 생기는 문제가 아닌, 우리가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말입니다.
행수만의 수업이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규정해 놓고 그걸 위해 자료를 모아 수업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참고하는 자료는 ‘정의’, ‘공평’, ‘평화’, ‘공동체’를 잘 구현해 낸 자료입니다. 사회상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명한 책을 읽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을 알려 주는 책도 읽습니다. 이런 책은 당연히 진보 성향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객관적이고 올바른 지식에 의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이 자료의 바탕에 아모스가 외친 정의,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 배반을 때리는 요나의 절규, 폭력과 부정의로 세상을 다스리는 제국에서 총리를 70년이나 해 먹은(!) 다니엘의 기도, 무엇보다 한 번도 정의와 공평, 올바른 정치를 외치지 않으면서 정의롭고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던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까?
어느 쪽이 우선입니까? 이 수업이 행복한 수업을 만드는 기독 교사의 수업이라면 말씀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걸 목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다 보니 진보 성향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은 진보적이었습니다. 정치적 보수인 사두개인들은 논쟁 대상에 끼워주지도 않으시며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을 부유층 인사들의 거액 헌금보다 귀하다 하셔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목숨 걸고 로마에 반대한 바리새인들과 부딪쳤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악의 욕까지 동원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보수파 사두개인들의 무능력을 꾸짖고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싸우셨습니다. 진보를 넘어선 열심당의 요구도 묵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로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마태복음의 1/4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실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상한 모범입니다. 어떻게 수업을 해야 예수님을 본받는 걸까요?
아주 가끔, 예수님이라면 상상도 못하는 문제 교사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예수님 수준의 수업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동료 교사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수업을 합니다.
저는 타락을 염두에 두지 않은 수업은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구속에 무게를 두고 구현될 세상 모습, 즉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상만을 설파하는 수업에 복음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 복음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이 멋지긴 했지만 그걸 이룰만한 능력은 ‘이 모든 것을 이룰 능력은 타락한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온다’는 고백에서 나옵니다. 이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사명보다 우선한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책임 회피나 노력 무용론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난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걱정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음이 전해지는 걸 기뻐했던 바울처럼 항상 수업을 할 때 복음을 마음에 두고 해야 합니다. 지도안을 짤 때도 하나님을 전한다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복음의 열정을 수업에 담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면 이렇게 표현되어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런 마음이 제게 없기 때문에 제 자신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워 이런 내용을 쓰는 겁니다.) 하나님 이름을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전해지는 수업은 여러 책에서 읽은 자료를 바탕으로 멋진 방법을 써서 계획에 맞게 전하는 수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수업은 엉망으로 했지만 아이들이
“우리 선생님, 왜 저러실까? 그냥 정답을 알려 주지 않고 왜 날마다 에둘러 말하실까? 뭐 그리 답답한 게 많을까?”
하고 묻는다면 더 낫지 않을까요! 깔끔하게 포장된 교육이 아니더라도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당황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사가 아무리 지식을 공명정대하게 알고 좋은 방법으로 잘 가르쳐도 교실이 하나님 나라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건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열망이 아닐까요? 열망이 바리새인들의 것처럼 초점을 잃은 욕심이 되지 않으려면 진짜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인 말씀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이슬처럼 조금씩 자라게 하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 써먹지 못합니다. 경제를 가르칠 때 어떤 내용을 꺼내겠습니까?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에는 주인에게 땅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걸 가르치겠습니까?
토지 공개념이라는 대답이 있다면 정치는 어떻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을 바탕으로 합당한 복종을 말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정말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이게 우리 안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배움의 공동체도 좋고 수업 비평도 좋습니다. 교과 통합, 재구성 모두 우리를 발전시키는 좋은 일입니다. 모두 열심히 합시다. 먼저 이 질문부터 하구요.
“이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합니까? 내가 좋은 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는 수업이라면 감수할 만큼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지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노력한 분량만큼 임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그렇게 오지 않지요. 수업에 가난한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제 수업은 너무 멀었습니다. 저도 수업 잘한다고 소문났습니다. 신문지 한 장으로 자전과 공전을 수업하고 아이를 실험 맨으로 삼아 아이들을 쫘악 끌어당깁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만족한 수업을 돌아보며 영혼이 슬퍼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업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수업에 대한 행수만의 고민이 더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수업 만들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영기의 교실 묵상 7 : 어둠의 교사 vs 빛의 교사 #2 (0) | 2011.05.04 |
---|---|
재스민 회원과 재스민 혁명 (0) | 2011.03.28 |
수업준비, 우리 이제 페이스북으로 해요 (0) | 2011.03.28 |
어둠의 교사 VS 빛의 교사 (0) | 2011.03.28 |
대구에서 풀어내는 행복 수업 이야기 (0) | 2011.02.22 |